─김지현, 『파브리카』(호밀밭, 2022)
P는 완전히 엎드려 잔풀들이 자잘한 흙바닥에 몸을 밀착시켰다. (…)
풀들 사이로 몸을 수그렸다. 코를 풀잎 속에 박았다. 고름이 차오른 뺨에 날카로운 풀의 단면이 스쳤다. 발등에 반동을 주면서 몸을 앞으로 밀어 본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다시 앞으로, 아주 조금씩밖에 나아가지 않았다. (…) 다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만이 유일한 생의 이유인 것처럼.
(135-136쪽)
「구인蚯人」의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수개월간 내린 비로 인해 도시는 지렁이들로 뒤덮인다. 그런 곳에서 P는 미화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P는 오른쪽 뺨에 붉은 점을 지닌 탓에 어릴 적부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왔다. 여기서 P는 곧 지렁이와 다르지 않다. 그 수가 늘어나도 그건 “돌연변이”일 뿐이고, 그렇기에 없애야 하는 “사냥”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지렁이들. 붉은 살점으로 난도질당한 지렁이, 그 사체를 청소해가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얼굴 없는 목소리”를 P가 계속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P의 붉은 점이 검붉게 곪아가듯 그 낙인은 더욱 심해진다.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지렁이 “청소”가 이루어지지만 오히려 도시는 거대 지렁이에게 점령당한다. 정부의 조치로 사람들의 활동은 제한되고 결국 거대 지렁이를 “집단 몰살”하기 위한 대대적인 조치가 시작된다. 지렁이를 소탕하기 위한 총성만이 거리를 메울 뿐이다. 게다가 원인 불명의 붉은 반점이 몸에 돋아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간다. 함께 일하던 웅식 아저씨는 오른쪽 턱에 생겨난 피고름이 P에게서 옮은 것이라 소리치며 그를 패대기친다. 혐오의 대상인 지렁이가 끝내 제거되고 마는 과정은 P가 혐오와 차별을 받으며 세계로부터 소외되는 모습과 겹친다.
어떤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결국 P는 지렁이 되기를 선택한다.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훼손당하고 인간 아닌 생명체들은 처참히 죽임을 당한다. 풀숲 역시 “인간의 전유물”이 되어버렸으나 P는 바로 그 생태공원의 풀숲 속으로 들어가 지렁이가 됨으로써 도시와 자연,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의 경계를 무화해버린다. 세상 속에서 P 역시 상징적 죽임을 당한 셈이지만 그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는 순간, 그것은 “유일한 생의 이유”로 반전된다. 이들 내용을 따라 다시 전술한 인용으로 돌아가 보면, 다른 세상(풀숲)으로 아주 조금씩 나아가는 지렁이 인간(蚯人)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지현의 소설집 『파브리카』에는 직면한 상황으로부터의 분리 혹은 결별을 택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구인蚯人」에서 P가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어서 존재 변이를 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브리카」의 혜영은 “새 얼굴”을 갖기 위해 F.M.P.(Face Modeling Project) 실험 대상이 되길 자처한다. 이목구비가 닮은 가족으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쳐도 끝끝내 도망칠 수 없었던 혜영에게 새 얼굴은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매혹이다. 한편, 가족을 건사하는 데에 평생을 바친 「흰 콩떡」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다. 엄마, 나, 남동생의 무사한 생활 저변에는 “아버지의 노동”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그 존재 자리는 일상에서 잊혀간다. 그의 노동으로 가능한 생활이지만 가족들은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그 노동의 가치를 잊고 만다. 냉동고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떡이나 먹을 수 있는 기한을 넘겨 아예 쉬어버린 떡은 아버지의 처지와도 같다. 집(가족)으로부터 안식을 얻지 못한 아버지는 가출함으로써 비로소 편안함을 누린다. 「방」에서 중희는 취업에 실패한 뒤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에 은둔하며 지낸다. 방식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분리 혹은 결별하는 이유는 인물들 각자가 마주한 현실 세계에서 이보다 나은 방법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놓인다는 설정은 그들이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어 있음을 잘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구인蚯人」에서는 “예보되지 않은 장마”가 지속되어 결국 거대 지렁이와 맞닥뜨리고, 서울 생활을 하던 「누수」 속 서술자는 결혼을 하면서 부산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일상을 보내던 중 갑작스런 누수로 곤혹을 겪게 된다. 「방」은 잠시 찾아온 평온이 소음으로 인해 다시 산산조각이 나는 현실을 그린다. 부모님 집으로 온 이후 “이 방에서 이대로 계속 지내는 것”이 소원인 ‘나’를 다시 괴롭히는 건 소음이다.
사실, 세상은 그리고 소설은 온통 소리에 잠식되어 있다. 층간소음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소설에도 계속해서 어떤 소리들이 묘사된다. “둔탁한 도구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 “현관문이 닫히고 도어락 잠금쇠 걸리는 소리”, “바람 새는 소리”, “좁은 방에 누워 옆방에 들어앉은 이름 모를 얼굴이 돌아눕는 소리”, “3년간 맞춰 놓은 알람” 소리, “효율이 너무 낮아 전기세가 비정상적으로 나”오는 냉장고 소리, 노트북의 “모터 도는 소리”, “복사기가 고장 났을 때 종이가 걸려 버벅거리던 소리” 등등등. 소리에 압도당한 채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쪼그라들었다.”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소리(소음)로 치환해 그 모습들을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 「방」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세계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계약직으로 일하던 중희가 “복사기를 고치기 위해 사무실에 상주하는 5분 대기조처럼” 일해야 하는 상황, 중희의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희망고문을 계속하는 지사장, 시위에 딱 한 번 참석했다는 게 명분이 되는, 게다가 전염병까지 겹치면서 중희는 완전히 주저앉고 만다. 소음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으며, “나는 차곡차곡 찌그러졌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나는 사회 속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진입에 성공하더라도 실패자가 되어 돌아온다.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중희와 같은 개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세계니까,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중희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집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다. 가족도 예외가 될 수도 없다. 공장이 폐업할 위기에 놓이자 아버지는 중희에게 “먹고 살길을 알아서 찾”으라고 말한다. 6개월 전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받아주었으나 그의 삶마저 위태로워졌으니 서로를 보듬어줄 수가 없다.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중희는 소음이 재발, 지속되자 결국 폭발해버린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소음에 복수하는 방법이라든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1년 전 업로드 된 취준생 시절의 경험담인 「위층에 괴물이 산다」―는 층간소음의 피해와 가해가 뒤얽혀 서로를 적대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천장을 통해 전달되는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위층 문을 두드리는 중희 역시 마찬가지다. 중희가 마주한 건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노인”이었다는 사실은, 중희 역시 ‘괴물’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소설 초반부에 이미 “귀만 남은 괴물이 된 것 같았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 역시 이로써 확인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나만의 밀실”을 되찾은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곳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지렁이 같은 크랙이 순식간에 방 전체로 뻗어나갔다. 방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그 균열 이후, 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소설이라는 세계에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작가다. 거대한 세계,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도 미미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구인蚯人」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출발점으로 해서 즐거우면서도 의미있는 길을 만들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구체적인 생활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작가의 장기인 만큼 이를 잘 살려 나갔으면 한다. 『파브리카』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만을 두고 섣불리 작품세계를 평가하는 일은 경계하고자 한다. 불가능으로 점철된 세계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가능의 세계를 구축해가려는 작가의 길을 응원하는 편에 서고 싶다. 표제작이면서 미니픽션인 「파브리카」가 작가의 실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새로운 인류를 위한 인체 해부 및 개조, 유전자 실험”에 참여한다는 건,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말의 가능성에 자신을 내던지는 적극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혜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수많은 얼굴을 달고, 역사를 업고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새 얼굴을 갖고자 한다. “순식간에 우리를 한패로 만들어 버리는” 이목구비를 지우기 위해 성매매, 임신중절수술까지 하면서 마련한 비용으로 성형을 한다. 그러나 그 “감옥”을 탈출하는 데에 실패하고 끝내 인체 해부 및 개조에 몸을 맡긴다.
새 얼굴을 갖고 싶어하는 혜영이 새 얼굴을 드린다는 제안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더 이상 그 어떤 역사도 물려받지 않겠다”는 다짐은 끝까지 가본 혜영의 절박한 심정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열망과도 같다. 단, 이전의 역사와 절연한다는 것과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 사이에는 다층적인 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작가 역시 「구인蚯人」에서 그 경계의 안팎을 이미지로 잘 형상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파브리카」에서는 이를 섬세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켜켜이 쌓인 더깨를 벗어나기 위해 가볍게는 고모, 할머니, 아빠와 같은 관계 중심적인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늙은 여자, 노인, 남자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살냄새”, “근원지의 냄새”를 역겨워하는 혜영의 혐오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위험성도 지니고 있다. 층층이 이야기를 쌓아올리기엔 짧은 분량인 미니 픽션이라는 장르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혜영에게서 역사의 다층적인 결을 들여다보려는 의지는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원인이 된 가족의 이야기는 단 몇 줄로 요약되어버렸고, 행간에서 발생하는 오해도 적지 않다.
가족들 각자의 사정을 전면화해서 드러내는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다. 「흰 콩떡」에서 아버지가 가출한 뒤 아버지를 찾아다니며 ‘나’는 그의 생활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만난다.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의 삶을 헤아린다. 「누수」에서 결코 거리감을 좁힐 수 없었던 엄마와의 관계는 누수를 잡으러 온 대영누수 사장과 사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해소된다. 선한 의지가 만들어내는 선한 결말이기에 따뜻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허나 선함은 ‘나’의 영역 내부에서만 작동한다. 「흰 콩떡」에서 아버지를 찾은 화자의 눈시울은 붉어지고 아버지 또한 그 마음을 알기에 무심한 듯 흰 콩떡을 던져주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해의 여지를 열어둔다는 점이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결말로 인해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인물이 돌연 납작해지고 만다. 「누수」 역시 마찬가지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내뱉는 대영누수 사모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웃으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엄마와의 부대낌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흰 콩떡」에서도 처음으로 제주도로 떠난 엄마가 여행을 즐기지도 못한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가족들의 흥미로운 이야기, 관계가 야기하는 불편함을 가지각색으로 드러내는 소설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인 듯하다. 상대를 헤아리고 나도 잃지 않기 위한 작가의 마음속 불씨는 지펴졌고, 그것이 『파브리카』가 이룬 성취랄 수 있겠다. 이제는 각종 도구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 불씨가 스며들거나 번지거나 타오르거나 재가 되기도 하는 등의 이야기들을 곧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