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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견디는 삶에서 변형시키는 삶으로

─배이유, 『퍼즐 위의 새』(알렙, 2015)


   한 마리의 새는 자유를 원한다. “여행 떠날까?”(「너라는 책」, 201쪽) 상상이든 실제든 그녀의 소설을 펼칠 때 우리는 모두 새가 되어 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새는 퍼즐 위에 붙박여있다. 소설집 이름 그대로 ‘퍼즐 위의 새’다. 새의 자유로움은 조각조각 맞물린 퍼즐에 갇혀 부자유를 겪게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맛있게 구어진 ‘버터오븐구이’가 된다. 그녀는 소설로 들어가는 입구에 “『퍼즐 위의 새』로 즐기는 레시피―새(bird) 버터오븐구이와 파스타 알리오올리오”를 정성스레 차려놓았다. 조금은 잔혹하면서도 상당히 사실적인 이 요리법에는 여행자인 새를 옥죄는 슬픈 역설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치 ‘압정 위의 패랭이꽃’과도 같다. “우리네 삶이, 생명이 그만큼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뜻으로 적어봤네. 압정 위에 패랭이꽃이 필 수 있겠나. 세운다면 그건 기적이지.”(「압정 위의 패랭이꽃」(이하 「압정」), 48-49쪽) 불가능한 일이라지만 그것은 우리 삶에 들러붙어 불안과 공포를 싹틔운다. 역설은 무럭무럭 자라 이 현실을 지배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해 방사능에 피폭될 위험이 존재함에도 안전지대로 피난하지 않는 다니와 레미에게 있어서 이곳과 저곳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다니에게 이곳이 아닌 저곳은 닫힌 세계, 거대한 교도소나 정신병동과 같았다.”(「압정」, 50쪽) 현실이 곧 감옥이나 정신병원과도 같기 때문에 사실과 환상, 현실과 꿈은 쉬이 분리되지 않는다. 조각으로 파편화된 퍼즐이, 첨단(尖端)의 압정이 우리의 현실인 것처럼, 새의 이미지는 꽃으로도, 섬(‘조도(鳥島)’)으로도, 인간으로도 화(化)한다. 다시금 묻자. 나는 자유를 원한다. 여행 떠날까. 배이유가 첫 책에 ‘체체’라는 이름을 붙이고 ‘쾌활한 유랑자’가 되길 바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걸음걸이는 결코 가벼울 수 없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은 분리되지 않은 채 삶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분홍 사다리」 속 그녀와 남편은 행복한 가정을 꿈꿨다. 그러나 전도유망했던 남편이 선배 검사의 뇌물수수 혐의로 희생양이 된 이후 그들의 희망은 산산조각난다. 그 일을 겪고 자살시도를 한 남편은 정신이상이 생겨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 인간이 된다. 더군다나 치킨집을 하며 근근이 삶을 버티고 있는 그녀를 감시하고 의심하는 그 때문에, 그녀의 삶은 생지옥과도 같다. 미쳐버릴 것 같지만 미치지도 그렇다고 다 놓아버릴 수도 없는 것, 그것이 어쩌면 현실의 다른 의미이다. “바위처럼 무거운 그를 내 삶에서 밀어낸다면 나는 가벼워지는가. 어떻게 분리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조각 퍼즐 같은 것인데.”(「분홍 사다리」, 30-31쪽) 쉽사리 가벼워질 수도 한없이 무겁기만 할 수도 없이 관계 맺고 있는 것, 그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녀가, 그가 말 그대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인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 다른 방법이기는 해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남편은 요양원에서, 그녀는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동네에서 여전히 치킨집을 이어가며, ‘뜨거운 통증’을 감당하면서 살아간다. “이게 내 몫이라면 견뎌야죠.”(「조도에는 새가 없다」(이하 「조도」), 77쪽) 

   배이유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핍이나 아픔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자들이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져 ‘거렁뱅이’처럼 도심을 방황했던 다니(「압정」), 유명 배우로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갑작스런 스캔들로 연예계에 재기하지 못한 채 떠도는 여자(「조도」), 다방 일을 시킨 새엄마에게 불복종했다가 팔다리에 화상 자국을 입고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자(「옛날 옛적 수족관에는」(이하 「수족관」)), 아버지 죽음 이후, 평생 일군 공장을 작은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버림받은 뒤 엄마와 어렵게 생활하며 숱한 자살 시도를 했었던 여자(「너라는 책」) 등은 모두 과거의 고통을 천형처럼 짊어진 자들이다. 불행했던 과거는 재앙/재난과 겹쳐지기도 하고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것은 생(生)과 사(死)를 동시에 표현하는 붉은색 이미지로 구현된다. 「수족관」은 제목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동화를 염두에 두고 있으나 실제는 잔혹동화에 가깝다. 아버지와 ‘나’, 어머니와 윤희가 한 가정을 꾸린다. 어머니가 죽고 새 엄마(‘마녀’)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이후, 혈연과는 무관한 세 사람이 가족이 된다. 마녀의 횡포가 일상이 된 삶 속에서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두 사람은 마녀를 죽인다. 공소시효가 끝나는 15년 후 두 사람이 만나 과거를 상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소설에서 살인이 정당했는가 하는 점을 따지는 것은 실상 무의미하다. 작가는 표준방식 혹은 정당성의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가정교육의 한 잣대라고 할 ‘젓가락질’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십대 소년 소녀가 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사건 자체에만 주목한다면 사실상 왜 그런 일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가 없다. 우리가 앞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상징조작된 이미지에 현혹되어 진실이 외면당하고(「조도」), 그러한 군중심리를 부추기는 미디어의 왜곡(「분홍 사다리」)에 유독 작가의 비판적 목소리가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위험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배이유는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한다. 「수족관」에서 ‘나’는 “과거가 기억의 틈을 비집고 들어올라치면 그것은 내게 일어나지 않은 먼 나라의 동화라고 속삭였다.”(155쪽) 있었던 일을 동화로 조장해 과거의 상처를 애써 모른 척하고 살아가려는 내 앞에 어느 날 불쑥 윤희가 찾아온다. 그녀와의 만남은 내 기억을 어지럽힌다. 이제 ‘나’는 이전처럼 과거를 망각한 채 살아갈 수 없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 

   「수족관」의 ‘나’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사회 구조 자체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에 그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하면서 일탈(「분홍 사다리」)하기도 하고 현실로부터 도망(「퍼즐 위의 잠」)치려고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든 현실적 상황을 회피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을 취하는 자들이다. 특히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원하는 모습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녀 소설 속 인물들은 혼자가 아니다. 결핍을 겪고 고독한 한 인간은 끝없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다시금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쉽게 무너질 수도 있는 ‘가짜 관계’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더욱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라는 말처럼, 그녀의 소설에서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하기다. 사랑했던 혹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이 ‘나’를 고통에 빠트리기도 하지만 ‘나’를 살아가게 한다. 상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진리는 어쩌면 두 사람을 가짜 관계로 환원시키지 않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관계 맺기는 상대와 어떤 것들을, 기호나 느낌이나 생각을 나눠 가지면서부터 진짜 시작되는 게 아닐까.”(「너라는 책」, 203쪽) 서로 얽매여 집착하거나 하나로 통일시켜 일치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누어가짐으로써 곁에 머무르는 것, 이로써 살아갈 힘을 얻고, 삶의 동력을 만들어내면서 그들은 불의가 판치는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  

   특히, 그녀에게 사랑하는 상대인 당신과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소설이 기억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라면 내게 있어서는 맞는 말이다. 특히 그의 소설들이.”(「너라는 책」, 193쪽) 소설을 통한 간접경험은 그녀를 여행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고, 또 세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 하나의 고리를 생성해 준다. 그녀의 자살 시도를 중단시킨 건 어머니였고, 동시에 살아갈 힘을 주는 건 그와의 사랑이자 그가 남긴 소설이기도 하다. 이미 끝난 그와의 사랑은 과거이고 그는 죽어 이 세상에 없지만, 여기에 남겨진 소설을 통해 그녀의 삶은 지속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들이 여전히 아물지 않았고 또한 그것이 쌓여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너라는 책뿐이다. 문학의 힘을 믿는 그녀가 그저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 이 현실이 영원하리란 법은 없다. 현재로서는 허망한 희망일지 몰라도 그 가능성을 놓지 않고 세상 곳곳을 유랑하다보면, 또 다른 현재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책과도 같은 당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체체야, 또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렴. 그녀 역시 그들과 함께 희망을 싹틔울 수 있기를, 그리고 또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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