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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주 Apr 09. 2023

내가 버린 붓끝에서 시작되는 세계

─배옥주, 『The 빨강』(서정시학, 2017)


   문학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언어에 그 누구보다 민감한 촉수를 지닌 자들이다. 허투루 언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고 언어를 붙들고 깊은 고뇌에 빠지기 일쑤다. 그러니 자연스레 하나의 단어 사용에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단 한마디를 길어 올리는 일일지라도 그 고민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낳는 효과 또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를 직조해내는 데에 몰입하다보면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말만 남게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그렇게 고투한 흔적들은 상실되고 언어는 무력해진다. 언어가 맹목이 되어버리는 그 순간 아름다운 표현은 완성할지라도 그것은 사어(死語)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문학하는 자들은 언제나 언어의 매혹에 현혹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세계가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드물 정도로 이곳은 추악하다. “아름다운 가면”(「읽을 수 없는 가려움입니까」)으로 가려진 세계에서 “앵무새는 공허한 목소리로 가장한다”(「거울과 앵무새」) 모방과 허위로 점철된 이 세계는 죽음과 공포로 가득한 「지어낸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끝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시인 배옥주의 두 번째 시집 『The 빨강』의 마지막 시편 「코끼리 옵션」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 가능한 모순된 세계의 실상이 그려진다. 수술과 시술, 퇴행과 진화, 결심과 포기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시적 주체는 “근데 선생님,/ 왜 옵션은 두 가지 뿐인 거죠?” 하고 묻는다. 그렇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세계는 명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대상이 된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불확실한 세계,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것을 탐문하며 그 독해불가능함을 언어로 넘어서고자 하는 자가 바로 시인 자신이다. 그들 언어가 그려내는 궤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시집을 여는 첫 번째 시편이 「평화 슈퍼」인 이유 역시 분명해진다. 정확히 양분되지 않는 세계의 논리를 드러내고 특히 취향이라는 말에 부여된 상징적인 힘을 직시하기 위함이다. 알다시피 취향은 아비투스에 의해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것이지 개인의 욕구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조장하는 사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하거나 모른 척할 뿐이다. 우리는 “취향의 높낮이는 엇비슷하고 수변공원을 삼킨 안개의 등고선은 비슷”한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글로벌화는 세계를 비슷하게, 즉 플랫화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아프간 난민소년”은 계서화된 세계질서, “졸음버스”는 그 위계에 따른 열악한 근무환경이 불러온 참사다. 난민이라는 존재, 가난과 죽음이 넘쳐나는 이 세계는 균질화되어 있다는 환상으로 덧씌워져 있다. 그들을 위한 세계는 사실 여기에 없다. “붉은 눈물은 쏟아지지 않”으며 전복과 혁명을 담지한 “역사적인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 이곳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분리되고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종식되지 않는 테러와 전쟁은 평화의 요원함을 확인시켜준다. “집은 멀고 평화 슈퍼는 닫혀 있다”는 평범한 구절은 이를 명확히 조준한다. 그러니 오지 않은 평화를 꿈꾸며 사유할 수밖에, 쓸 수밖에 없다. “소진되지 않는 몽상이 흘러내린다”

   굳게 닫혀 있는 그 문을 열어젖히기가 쉽지 않다. 「흐느끼는 발목」에서도 절단된 발목으로 살아가는 자의 삶이 꿈과 문이라는 시어와 접합되어 나타난다. “견고하게 닫힌 문 밖에선 헬멧을 벗어던진 누군가가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는 현실이 계속된다. 세계의 처참함은 악몽에 시달리고 “며칠 째 떨어지는 꿈을 꾸면, 발목을 버리고 싶었지만 발목은 맹목적으로 자라기 시작하고 밤이 되면 그림자는 어김없이 달의 발목을 끌고 나”간다. 이렇게 낮과 밤은 되풀이되고 현실과 꿈이 반복됨으로써 죽음과 가까운 삶이 끈질기게 돌아온다.   

창/문은 구획된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시적 장치다. 「노을은 중저음의 시간을 건너간다」와 「비밀 정원」에서 의사의 진단을 묘사하는 부분이 각각 “완고한 장벽”, “성”으로 표현된다. 의학(과학)의 세계는 완강하게 구축된 성채와도 같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그 세계 또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죽음의 시간을 건너간다는 표현, 의사가 휘갈겨 쓴 처방전을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저녁이 창가를 서성인다.”와 같이 감각하는 것은 획정된 세계의 문법을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지붕이야기」, 「근의 공식」, 「M31은하」에서도 문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안팎의 경계(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수학의 세계 역시 합리적 이성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파지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파의 삶을 근의 공식에 빗대어 드러낸 시편은 그 둘의 같지 않음을 “겹겹의 공식으로도 풀리지 않는 무게의 공식”이라 풀이하고, “문지방에 걸터앉”은 노파의 형상으로 그려낸다. 문지방은 숫자로 구분되지 않는 인간의 삶의 무게 그 자체다. 이처럼 완고한 이분법의 세계에서 셈해지지 않는 자들이 문턱에 혹은 그 바깥으로 쫓겨나 있다. 바깥으로 내몰리는 일은 곧 죽음이다. 「지붕이야기」에서 “부서진 창문 틈으로 난입”하기도 하고 「M31은하」에서는 아예 안드로메다로 추방되어 “다시 기어를 올려도 문밖이 된 우리”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화요 상담」, 「슈퍼마리오」, 「K팝 청문회」와 같은 시편들을 통해 제도의 내/외부를 대중문화적 코드로 재치있게 풀어내기도 한다. 중력과도 같아서 거스를 수 없을 듯한 제도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넘어서는 실험들이다. 제도권의 자장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들에게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고 더욱이 우리의 삶이 제도권 안에서조차 안전할 리 만무하다. “와이퍼의 반경 안에서 죽었다 살아나는 빗발들”(「와이퍼의 반경」)처럼 생사는 정해진 반경을 이탈하는 법 없이 왕복한다. 바깥은 곧 죽음이기에 그 상상력의 반경은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시인은 밀도높은 언어적 표현을 구사하며 반복되는 생의 리듬에 제동을 거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이번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는 글쓰기의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표제작 「The 빨강」의 “의도하지 않게 얽힌 의도는 내가 버린 붓끝에서 시작된다”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듯이 이 세계의 모순이 글쓰기를 낳았지만 그 글쓰기로 인해 또 다른 굴절이 발생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삶과 죽음, 현실과 꿈 사이를 유동하는 존재다. 불확정적인 세계에서 “증후군증후군”(「더치커피」)을 앓으며 “생각이 무성해진 내가 나를 잃어버”(「비밀 정원」)리는 일도 잦다. 분열을 겪으며 “꽃밭과 무덤이 사뿐, 자리를 바꾸는 사이,” 그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아니 그 “눈 깜빡할 사이!”(「꽃밭과 무덤 사이」)를 생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써나갈 수밖에 없다. “협박과 회유 사이”에서 “혓바닥이 뎅겅 잘릴지도”(「발설」) 모를 위험을 감내하고서 살아야 하는 「유령작가」인 셈이다. 말을 잃어버리거나 “말문이 부러”(「비밀 정원」)져도 “핏빛 루머가 흘러내”리는 세계에서 “칼 대신 볼펜으로 쑥대밭 연대기를 캐”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근원에 가족,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은 「쑥대밭 연대기」, 「조용한 가족」, 「지어낸 이야기」 등에 잘 나타난다. 주검 가득한 “벌어진 쑥대 사이로”(「쑥대밭 연대기」)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따라서 완고한 문법을 거스르거나 기존의 배치를 전치시키는 언어들이다. “고정불변의 취향입니까/산뜻한 오브제의 발견입니까”(「오브제의 새로운 발견」)라는 물음에서 알 수 있듯이, 삶 속에 자리한 개인의 취향인 양 여겨지는 것을 뒤집어 오브제로 활용한다. 자동화된 일상적 언어의 통념을 벗어나는 실험들은 곳곳에서 계속된다. “밤마다 습관을 바꿔 끼운다”(「홀릭」)

   시인이 비틀어놓은 일상 언어들에는 이 세계의 모순이 스며들어가 있기 때문에 시를 마주한 독자들 또한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카트와 커터」라는 제목, 그 시편이 바로 그 예다. “철컥! 백 원에 묶인 손목을 잘라버린다. 시식 왕만두를 자르던 만두누나는 언제 잘린 걸까. e 편한 세상 산책로 입구에 버려진 카트가 자른 것과 잘린 것에 대해 골몰한다. 손목이 시큰거린다.// (…) //자목련이 데자뷰처럼 추락하는 정오. 노파의 걸음을 끌고 카트는 이, 편한 세상을 건너간다.” 아파트와 대형마트의 편리함과 편안함에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그 사이에 가로놓인 처참함을 각인시켜주는 이 시편은 시대의 참혹함에 대한 사유를 놓지 않게 한다. 

   이처럼 시인은 현실 감각에 등돌리지 않으면서 시적 언어를 만들어나간다. 그 긴장감을 앞으로의 시집에서도 계속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한다. 『The 빨강』의 압축된 언어들은 확실히 제1시집 『오후의 지퍼들』보다 강밀도가 높다. 그럼에도 삶의 구체적 감각은 오히려 이전 시집에서 더 많이 발현된다는 점이 아쉽다. 지명의 사용이 구체성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첫 시집에서 자주 노출된 시인의 삶의 자리들은 사라지고, 이번 시집에서는 소설, 동화, 영화, 음악 등의 텍스트들로 대체되었다. 제목만 놓고 본다면 「송정 바다」가 시인의 삶의 터전을 보여주지만 이 시편이 유독 서정성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The 빨강』이 돌파하고자 했던 이분법을 도리어 강화하는 게 아닐까 한다. “죽어서도 죽을 수 없는 아웃사이더 in 아웃사이더”(「껍데기를 위하여」)를 위하는 방법에 몰두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끝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근데 선생님,/ 왜 옵션은 두 가지 뿐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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