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udi Sep 09. 2019

100일 글쓰기 마라톤 -11-

자유주제 : 연성(마지막)

  사실 이 포스트가 마지막이 될지 확신은 없습니다. 다짐에 가까운 말입니다. 아니, 사실 의무감입니다. 이 주제로 쓰는 일은 즐거웠지만 다시 읽어보면 징그러워서 견딜 수가 없네요. 징그러움... 그렇습니다. 저의 덕질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안전장치입니다. 저는 오메가 버스 세계관을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오로지 섹스신의 개연성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관인가요? 흠. 창작물 안에서의 대상화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도 좀 번거롭습니다. 이를테면 <전지적 독자 시점>에 초반 등장 당시 어린이였던 이길영과 신유승은 이제 14–15세로 중학생에 가까운 나이입니다. 그런데 많은 연성 물에서 둘은 7-8세에서 때때로는 5세에 가까운 아동으로 그려질 때가 많아요. 이런 걸 보면 즐기기 힘들어집니다. 양육자(로서 실격이지만)와 아동 간의 관계성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아이를 어려 보이게 묘사하는 건 올바르지 않으니까요.

  물론 항상 올바른 콘텐츠만 소비하는 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도 판타지 소설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싶습니다(장르를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장르에 견줄 필요 없이 훌륭한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것의 2차 창작까지 찾아보면서 세세한 도덕 기준 레이더를 팽팽 돌리고 싶지는 않아요. 성인 콘텐츠를 보는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덕질의 파도를 타다 보니 아무래도 좋은 연성의 기준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전편에서도 이야기했죠. 저번에는 연성의 카테고리 기준이었다면 이번에는 커플링 2차 창작에서의 기준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창작자의 캐릭터 개발 역량이 확실하게 드러나서 재미있거든요. 먼저 <전지적 독자 시점>입니다. 저는 유중혁과 김독자, 두 남자 주인공들에 대해 최소한의 애정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독자는 소설 속에서 보면 즐겁지만 실제로 10년 동안 멸살법을 읽은 게임회사 직원인 남자랑 친해질 일은 영영 없겠지요... 중혁이는 세상을 구할 수 있지만 본인 말투는 못 구할 것입니다. 저와의 거리감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유중혁 특유의 문어체 어투는 분명히 중요한 캐릭터성이기 때문에 유중혁과 김독자를 커플로 엮는 연성에서는 <전독시> 세계관이 아니라 고등학교나 회사의 유중혁도 항상 같은 어투를 사용했고 저는 그렇게 말하는 캐릭터는 좀 싫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세상의 모든 남자를 홀릴 듯한 여리여리한 여우 같은 김독자도 거부감이 들었고(이것은 모든 BL 컨텐츠의 ‘수’ 캐릭터에게 느끼는 거부감입니다.) 네... 무튼.

  그런데 포스 타입의 바다를 헤매던 중 한 2차 창작 만화를 읽었습니다. 세상을 구한 김 독자와 유중혁,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은 유료화가 되기 전과 같은 세상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냅니다. 커플링 연성이기 때문에 속전속결로 유중혁은 김독자를 좋아하고 김독자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걸 회피하는 상황입니다. 놀란 것은 일생의 최애캐인 유중혁에 대한 애정을 비롯한 감정, 김독자라는 인물의 회피적인 기질이나 인간 관계에 능숙하지 않은 특징을 잘 가져가면서도 매우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여기의 김 독자는 원작의 김독자와 같은 사람이지만 훨씬 대하기 편해보입니다. 원작의 김독자와는 조금 망설여지지만 이 김독자와는 저도 커피 한잔 하면서 멸살법 영업 정도 들어주고 싶습니다. 더 놀라운 건 유중혁입니다. 유중혁은 역시나 김독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눈치가 빠릅니다. 여기서 눈치란 김독자의 캐해석보다 더 주변인을 살피고 배려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문제의 말투는 여전하지만, 조금 무뚝뚝한 사람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조금 퉁명스럽고, 김독자의 회피를 봐주지 않고 똑바로 추구하는 것을 말할 줄 압니다. 제가 아는 유중혁인데, 이 정도면 얼굴만 보고 연예인으로 덕질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말수가 적으니 더 좋아할 것 같아요.

  창작자분이 다른 플랫폼에서 언급되는 걸 싫어하시니 구체적인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굉장히 감탄했습니다. 존잘님의 영업(?) 연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요. 아주 짧은 만화지만 원작을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으며, 원작 캐릭터의 중요한 특성을 잘 살리면서 소화하기 쉽게 잘 조리한 느낌입니다. 창작자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독자가 좋아할 만하게 캐릭터를 만드는 능력의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원작과 비교하게 되니까요. (싱숑 작가의 디벨롭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싱숑 작가의 전독시는 BL이 아니잖아요.)

  이런 창작자의 재량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2차 창작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작품의 2차 창작물입니다. <내가 키운 S급들>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전독시와 더불어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전독시 2차 창작 존잘님들이 가장 많이 함께 덕질하는 작품이다 보니 자연스레 읽게 되었죠. 개인적인 감상은 전편을 피스나 삐약이 시점으로 전개된다면 더 즐겁게 읽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캐릭터들이 너무 과해서 조금 부담스럽달까요. 피스나 삐약이 정도면 딱 좋습니다. 단점을 꼽으려면 꼽을 수 있겠지만 주인공 ‘한유진’은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귀여운 동물과 아동에게 처돌이가 되는 지점에서 공감도 많이 되고요. 한유현도 괜찮습니다. ‘저런 콘셉트의 포식자’ 정도로 생각하면 편합니다. 작중 나이가 어리고 고생을 많이 한 것이나 한유진 과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개연성을 확보하기도 하고요.

  견디기 힘든 것은... 성현제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작품 내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의 설정에 대해서 견디기 힘든 부분이 있음의 정도를 유중혁으로 단위를 설정하자면 저에게 성현제는 100중혁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투와 어휘 선택과 외양 설정과 스킬과 기타 등등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요. 내스급은 거의 내놓고 BL 구도 혹은 커플 구도를 의도적으로 연상하게 하는 소설인데 한유현과 한유진도 당혹스럽지만 (저는 근친 커플링을 견디기가 힘듭니다...). 점점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가는 한유진과 성현제는 정말 견디기가 힘듭니다. 근친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나마 커플링 연상을 견딜 수 있었는데, 성현제가 한유진의 양육자를 자처하자 그것마저 어려워졌습니다. 양육 관계에 로맨스나 성애를 연관 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알면서 방치하는 것은 더더욱...

  그런 연유로 존잘님들의 예쁜 그림을 보는 게 즐거우면서도 내스급 연성은 원작보다 더 노골적인 것이 힘들었는데, 딱 하나 성현제를 볼만 했던 것 역시 위의 존잘님 작품이었습니다. 한유진은 회귀하면서 모질게 미움받던 세상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자기를 좋아하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지금도 자존감 낮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눈치가 빠른 성현제는 그런 한유진의 정신 건강에 대해 기민하게 눈치챈 인물이죠. 연성은 그런 한유진이 생일 축하 전광판처럼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을 때 당황스러워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성현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성현제는 그냥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원작의, 사고방식이 보통의 인간과는 아예 다른 강한 종족 같은 느낌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재벌 아저씨 느낌은 없죠. 여기서 성현제는 한참 신경 쓰고 있던 자기보다 어린 청년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기꺼운 마음을 느끼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긍정적인 면이 성현제라는 사람의 본능적인 기민함이 아니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원작의 성현제라는 인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급기야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연성을 하는 존잘님의 눈에는 이렇게 캐릭터들이 정감 있게 보이는 것인지, 2차 창작 과정에서 일부러 가공을 하는 것인지 말이죠. 아마 그분에게 직접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정말 불편함 없이 원작을 즐기는 작품들은 보통 로맨스 판타지라고 분류되더군요. 그리고 이런 로판물들은 주인공이... 여자라서 일까요? 2차 창작물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일러스트나 원작의 내용을 따라 그린 만화 정도 더군요. 조금 슬프네요. 그러나 이 정도면 제가 어째서 최근 ‘연성’이라는 2차 창작 문화에 관심을 가졌는지 충분히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이 포스트는 피치 못한 사정으로 하루 늦게 업로드되었는데, 그 사정은 다음 포스트에서 바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100일 글쓰기 마라톤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