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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Nov 03. 2020

이 이야기를 하기 적절한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예요.

종현과 스스로 삶을 마감한 아티스트들을 기억하며.




내가 앓고 자주 생각한 우울증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많이 적은 것이 이 블로그일 텐데, 어느 날 우울증의 회복기에 들어섰고,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적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작년 말쯤 우울감과 자살 욕구가 정점을 찍었고, 올해 상반기에는 무기력감에 몸부림치며 뇌를 놀리고 덩달아 놀린 근육 덕에 저질 체력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의 중순쯤, 나는 3년 정도 복용해온 항우울제를 그만 먹어도 좋겠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나는 더 이상 우울증 환자가 아니게 된 것이다.

대낮의 악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엉엉 울고 몸부림치던 시절, 우울증에 대한 글을 쓸 때 나는 그런 소망을 적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우울증을 이해해달라고 설명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이야기는 너무 많이 했다. 나는 우울증이 좀 나아져서, 우울증에 대한 생각과 고찰을 좀 그만하고 싶다. 온종일 우울증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혀 있는 일이 지겹다.'

그리고 정말로 항우울제를 그만 먹게 되고 나서 나는 우울증과 우울증 안을 비집고 들어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서 더 감성적인 단어들로 적어대는 일들을 멈추었고, 그랬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우울증은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면 내 등 뒤에 서 있는 무서운 가상의 검은 개처럼 다시 나를 덮쳐올 수 있고, 여전히 그것은 두렵다. 하지만 한 번의 상징적인 회복의 경험이, 잠시 기분장애가 도지는 날에는 더 힘이 세지는 이 불안이 내일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라는 확신에도 힘을 실어준다. 멋진 경험이다.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한 3초 정도, 가장 최악의 상태였던 나에게 느끼게 해 주고 '조금만 견디고 살아남으면 이런 기분으로 사는 날이 온단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마 과거의 나는 믿지 못하면서도 긴가민가하며 살아봐야지, 할 것도 같다. 


우울증과 자살, 자해 사고의 당사자에서 한 발자국 거리가 생긴 다음 아주아주 오랜만에 종현의 노래를 쭉 듣게 될 기회가 있었다. 조금 지친 날이었고, 감정 기복이 있던 날이었다. 종현이 세상을 떠나던 때는 나 역시 너무나 힘들고 괴롭던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슬프고 슬퍼하느라 살필 여력이 없던 것들이 보였다.


그가 쓴 가사들은 어떻게 그다지도 이타적인지.


그가 얼마나 다정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나 꼼꼼히 살펴보기 전에도 알았던 것은, 그는 내가 아는 고통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고 정신증이라고 하지만(결국은 호르몬과 뇌의 병이고 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갖가지 신체화 증상을 동반하는다는 것과 별개로), 중증 우울증에 시달릴 때에는 종종 명치 깊숙한 곳에 뜨거운 망치로 묵직하게 누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낄 때가 있었다. 길을 걷거나 그냥 차가운 밤공기를 만끽할 때도 이 통증은 몸과 영혼을 바닥 아래의 아래로 나를 통째로 잡아끌어서,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냥 멀쩡한 것처럼 걷고 있지만, 누가 툭 하고 건들면 갑자기 주저앉아 울어 버리고야 말 것 같은 통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하게 우리를 시시각각 갉아먹고 있는데 대개의 경우 멀쩡한 얼굴로 힘들지 않은 척할 수 있는 종류의 통증이라는 점에서 자주 결정적인 비극의 오래된 복선이 되고 만다.

이런 통증을, 고통을 누려 마땅한 사람은 없다. 정말이지, 그것은 누구에게든 도와달라고 아우성쳐서 벗어나고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팔을 붙잡아 끌어내야 하는 깊고 검은 저수지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 그런 고통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을 알 때마다 속절없이 슬퍼지고 만다. 사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데도. 우울증은 그렇게 우리가 좀 더 이타적이고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는데, 이타성도 연민도 아름다운 가치지만 우울증은 그런 교훈을 얻자고 치르기에는 너무 혹독한 대가다.

문학이든 무엇이든 다른 방식으로도 얻을 수 있으니 굳이 우울증일 필요는 없다고 단언하고 싶을 만큼.


그리고 나는 종현의 가사를 듣고 읽다가, 감수성이 풍부하고 다정한 아티스트였던 그 사람이 자주 자신이 겪는 것과 같은 통증을 남들 또한 겪으리라는 생각을 하느라 힘들어했을 거라는 짐작을 했다. 세상에 그런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 또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음 아파하던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그저 무례한 것이 아니라면 다행이지, 그저 상상일 뿐인 '느낌'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능력이 내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김이나 작사가가 말했듯이 종현이 쓴 많은 가사들은 그가 겪었던 힘든 상황에서 그가 듣고 싶어 했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 나름대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것 같은 말들로 가득하다. 

'욕조 속 물처럼 빈틈없이 따뜻하게 몸을 감싸는'감각, '서툰 실수가 가득했더라도 창피한 내 하루 끝에는 너라는 자랑거리가 기다리고' 있고, '뭉특한 나의 두 손이나마 포근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나 - 혹은 노래를 듣는 청자인 당신 - 의 하루는 맘껏 울 수도 없고 맘껏 웃을 수도 없는 그런 지치는 하루다. 

내가 가장 많이 들으며 그를 애도했고 또 스스로 위안을 얻은 <하루의 끝> 가사에서 '나'와 '너'의 경계는 아주 모호한데, '서툰 실수만 가득했던 창피한' 하루를 보낸 것은 '나'였다가, '뭉툭한 두 손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자연스레 함께 숨을 맞추고 싶은' 지친 하루를 보낸 것은 '너'였다가, '너'에게 목을 감싸 좀 더 아래 주물러 달라고 부탁하는 그 어깨의 주인은 '나'였다가.... 그렇게 화자와 청자의 구분이 모호한 노래를 멍하니 듣다 보면 내가 얼마나 고단한 하루를 보냈는지 다 아는 것만 같은 그의 목소리에, 이런저런 위로를 찾고 싶다는 노랫말에 공감하다가, 나처럼 쉽지 않은 하루를 보낸 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내가 그의 자랑이라는 말에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무거운 숨을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정말 수고했어요'.


우리에게 치명적인 소외감을 유발하는 요인이 비단 우울증만은 아니다. 소수자 정체성이나,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기억일 때도 있고, 가지각색의 고통스러운 경험들, 혹은 그것들 자체가 아니더라도 그것들이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서... 요지는, 이런 것들은 인간을 외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까? '고립감'이라고 해도 좋겠다.

사람을 만나고 싶고, 교류를 하고 싶고, 그런 사교 욕구와 다른 더 깊은 결핍이 있는데, 거기 있는 줄 정확히 인지하기도 힘든 이 결핍이 마음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그 결핍은 사람마다 조금씩 섬세한 모양으로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딱 잘라 어떤 결핍인지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그 결핍이 어떤 때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는지에 대해서는 좀 아는 것 같다. 

"아아, 누군가 저기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그 결핍은 조금 채워지고,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 준다. 그 누군가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냥 정확히 어떻게 어떤 식인지는 몰라도 내가 힘든 건 알겠다며 거기 있어준다는 누구여도 좋고, 나와 같은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나름의 결론을 내린 누구여도 좋고, 엇비슷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나름대로 건강하게 소화해 본 경험이 있는 누구여도 좋다. 단지 그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안도감만 느낄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가끔은 지옥 같던 타인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 


그리고 비슷한 도움을 주려고 손을 뻗는, 그러니까 온 마음을 담은 노랫말을 적어 내려간 종현 같은 사람들은 대개 누구보다도 그런 타인의 구원으로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많이 해본,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우울증은 오래된 에어 팟처럼 배터리 효율을 망가뜨리는 질병이라, 우울증 환자들은 평범하거나 생산적인 일상을 사는 데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항상 우울증에 소비되면서 빠져나가고 있는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서거나 제대로 몸을 씻고 밥을 먹는 등 사소한 일부터 노래를 만드는 창작행위에 이르기까지, 시작부터 수행하는 데까지 남들보다 훨씬 힘이 든다. 


중요한 시험의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다거나 하는 긴장된 상황에서 늘 하던 사소한 잡다한 일이든 반드시 실수 없이 해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든 제대로 집중하려면 평소보다 훨씬 애써야 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우울증을 앓는다는 것은 항상 그렇게 긴장할 이유가 있어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원래보다 써야 하는 힘이 훨씬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슬픔에 빠뜨리며 이르게 세상을 떠난 종현을 비롯한 그 여러 그리운 사람들이 아티스트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흔히들 예술가와 우울증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라느니, 영감의 원천이라느니 하는 환상을 많이 말하지만 우울증을 앓은 예술가들은 그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나 창조성을 포함한 통찰력을 기를 때 우울증이라는 덤터기 값을 치른 사람들일 뿐이다. 정말 중증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없거나 하려고 용을 쓰다가 방전되어 버린다. 실제로 우울증에 걸리면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을 포함한 뇌기능이 저하된다는 것이 이미 관찰되었는데, 창조적이거나 복잡한 사고를 요구하는 뇌의 기능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창작자라면 건강할 때 더 훌륭한 아웃풋을 낼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우울증이라는 골칫덩이가 항상 그렇듯 중증 우울증이라는 녀석도 항상 일관되고 꾸준한 증상을 보이는 건 아니다. 영양 상태부터 시작해 온갖 요인들로 잠시 나아지기도 하고 꽤 오래 나아지기도 하고 어제만큼 끔찍하게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상태는 아닌 정도로만 나아지기도 한다. 집중력과 고도의 에너지를 요하는 창작물들은 대부분 이렇게 조금 견딜 만한 시기에 완성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요점이 뭔가 하면, 비단 종현뿐 아니라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며 당신이 떠올렸을 많은 아티스트들 대부분이 (슬프지만 명백하게도) 끔찍한 우울증을 경험했을 것이며, 미미하거나 어쩌면 괄목할만한 회복 또한 경험했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그런 회복,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 꽤 괜찮은 나 정도의 회복까지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한다. 그들이 남긴 유・무형의 창작물들이 그 증거다. 집중을 요하는 일을 해내고, 나아가 남들에게 어떤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해 결과로 남길 때, 적어도 그들은 일생 최악의 중증 우울증 증상에서는 껑충 도망쳐 한숨을 돌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숨 돌릴 만큼 회복해 여력이 생길 때면 남을 위로하고 좋은 영향력을 주고 싶어서 노력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속이 더 쓰리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중증 우울증을 앓으면서 불쑥불쑥 찾아오던 심한 자살사고가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한다.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맹목적인 기분. 회복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애쓰던 사람에게도 소나기처럼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그 '병증'으로 치명상을 입지 않은 것은 정말 자동차 사고를 피한 것과 같았다. 

그런 병증에 면역 없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그렇게 면역이 약해질 때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 비극이 아닐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단일한 사건 하나는 아주 충동적으로 일어난 사고로 여기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내게 비슷한 사고가 일어날 뻔했을 때 나는 아주 우연히 옆 집 발코니의 센서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바람에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정말 그만큼의 우연으로 나는 살았다. 그래서... 함부로 그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을 짐작하는 건 안될 일이겠지만, 나는 그들이 약한 사람이었다거나 남겨져 추모하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져 마땅할 만큼 연달은 불행과 슬픔 속에서 삶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중 대부분은 내가 그렇게 몸서리치는 끔찍한 고통을 겪고서도 타인에게 손 내밀 줄 알았던,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들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고통을 알고 겪으면서도 남을 돌볼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그리고 그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찰나의 사고로 잃은 우리가 안고 갈 공동의 기억들이 슬프지 않을 방도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설명해도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적절한 날 같은 건 없겠지만, 한 번쯤은 쓰고 싶었던 이야기니까 오늘 쓰기로 했다. 


그들은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속절없이 그 상실을 앓는다. 길게 적은 글들이 이 한 줄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없겠지만, 그렇게 맞서 싸우려 애쓰던 사람들도 결국 지지 않았느냐는 패배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그 지난한 싸움에서 그들이 승리하고 쟁취해낸 수많은 결과물들 덕에 그들을 알고 사랑하게 되지 않았던가. 사랑한 만큼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 남은 우리의 몫일 테고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줄 방법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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