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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양심

by movere

'자격은 무슨 기준으로 누가 왜 정하는 건데. 나 자신에게도, 선생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런 조건을 들이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너무 지쳤다'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중에서)


대략 어떠한 사안에 뜻대로 의지대로 안될 때 양심에 호소하다 또 안되면 오기가 발동하기가 한다. 뜻을 달리하는 양자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은 법과 원칙이 있는데 그때는 법의 기준대로 하면 된다.


문제는 종교, 기질, 성향, 가치관등 명확하지 않은 정서적인 부분에 대해 양갈래로 나뉠 때는 양심보다 오기가 더 발동하고 궤변에 변덕까지 합세해서 편 가르기가 더 가중된다.


가족이나 친지까지 설득해도 안 되는 것은 무원칙성 신념 즉 잘못된 고집에서 분파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분법적 사고가 먹혀드는 이유가 애당초 없는 기준을 만들어서 들이대고 여기에 다수를 얻는 세력이 우위를 점한다.


사태가 이지경까지 왔을 때 간과되는 것이 바로 피해를 본 개인이나 집단이다. 다수는 소수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하는 경향이 세다. 그게 정의든 불의든 간에 말이다. 많은 대다수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피해를 본 사안이 위법적이라면 그 기준이 명확해서 대략 논란이 적다.


근데 따지고 보면 명확한 것을 싫어하는 이들이 선명한 법의 잣대의 기준에 처벌을 요구하듯이 완전 다른 사안에서 명확하지 않은 기준에 대해 타인의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하고 억압하는데 동조 또는 주도한다면 해명이 될까? 그게 설명되지 않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아서가 더 맞은 말인 듯하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순 없다.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고 시행착오와 변덕 그리고 가벼운 이탈도 하면서 살아간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렇지만 타인의 불안과 두려움을 유도하고 방관한 것이 법적 근거가 없다고 해서 다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지금 시국에서 가족들조차 양심에 호소해도 잘 바뀌지 않는 것이 오기다. 이번 사안으로 많은 이들이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것과 마찬가지로 양심에 호소하는 이들 또한 그만큼 다른 집단에서 타인에게 불안과 상처를 주고 살아갈 수도 있다. 피해자만 또렷이 기억하고 가해자는 망각하는 법이다.


그래서 기준은 별반 기대할 것이 못된다. 양심에 호소한다고 한들 탄핵을 반대할 사람들은 반대표를 던질 것이고 동시에 나 또한 이런저런 부류들에겐 기대하지 않는다. 양심에 호소하고 싶지도 않다. 결국 기준은 자기가 선택하고 옹호하고 자기의 의지대로 만들어 갈 뿐이다.


결국 정서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느낀 이들만 죄인이 될 뿐이다. 서로가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다수가 진리일 뿐이다. 집단적 린치가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밥벌이터부터 두 사람이상 모여있는 집단에서는 피해의 진실을 토로하는 양심선언 같은 것은 좀처럼 없다.


기준 없는 양심은 오기를 이기지 못한다. 기억은 원칙보다 선명하다. 결국 상식적인 단순한 진심은 전달되지 못한다. 결국 세월 뒤에서 녹슬 것이 분명한 철옹성 같은 집단 망상만이 현실로 둔갑되어 승리할 뿐이다.


이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가 아니라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감이라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은 총칼이 아니라 어쩌면 익숙하고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2024년 모순된 계절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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