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이렇게 낯설게 난해한 소설이긴 처음이다. 단장취의(斷章取義)가 되기 싫어 소설 속 인용구를 남기지 않으려고 쓰기도 처음이다. 제목에 이끌려 온 읽기 소설이었는데 막상 흔적을 남기기도 그렇다고 그냥 무심한 채 돌아서기에 망설임을 주는 읽기여서 자취를 남기기로 했는데 무엇을 남겨야 할지 고민된다.
소설 속에서 언급한 연금술은 보편적 정신을 발휘하기엔 충분한 소재이지만, 1889년에 태어난 창업주의 일대기에 빗댄 회사의 전략적인 조직 분화는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시대적 동질감이 교감되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말하려는 보편적 정신은 바로 보편적 정신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기업의 흥망성쇠, 감시체계의 테일러 시스템, 어쩌면 현대사회에 일갈한 사훈 같은 강령 모든 것이 개인과 조직의 제1과오(알파 리스크), 제2과오(베타 리스크)의 시행착오적 결과물에 염증과 번민을 벗어난 나름 탄탄한 부지불식간의 조직운영시스템이 마치 현시대 기후, 질병으로 인한 단절의 속성의 한가운데 있는 것과 유사하다.
회사의 결정이 아주 틀릴 확률과 더불어 조직의 결정이 완전히 맞을 확률이 똑같다는 산술적이고 과학적인 면을 논거함에 산술적이고 전략적이면서 데이터를 근거로 하는 바탕에 보편적 정신이 적극 개입되어 부족함이 채워지는 음과 양의 조화로움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CEO 자본의 소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백년의 고독 (마르케스 저)이 인용되어 있는 듯한, 희극과 비극의 양분도, 희망과 절망의 대조도 아닌, 홀로의 안착과 안녕을 희구하는 작가 본연의 심연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데 전혀 보편적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쓰인 같기도 하고.
작가의 말처럼 모순과 결핍을 이해하거나 거부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는 비극적 산물을 통찰하는 면을 작가가 말하는 흑인으로 빗댄 비유일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 그리고 삶을 산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소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삶의 문화는 관광, 여행, 놀이, 관람,운동 등의 유희적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중이다. 이제 비대면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이고 홀로의 삶은 순응과 거역의 이중적 삶의 한가운데서 삶의 콘텐츠로 변화 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현재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포커스인 것 같다.
변화를 갈구하지만 금방 바뀌지 않는 이유가 스스로의 변화가 알파 리스크인지 베타 리스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존과 폐기가 동시에 일어나지만 어떤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결국 성취나 패배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이다. 조금씩 변화하는데 돌이켜보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것이다.
책이라는 다소 무겁고 쇠약해진 심각함을 모호하고 애매한 읽기 방식으로 가벼우면서 빨리 읽을만한 그러면서 그 무언가 생각해볼 만한 책을 잘 골랐던 여름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인용해본다.
' 인간은 고독할 때 잠시 순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