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를 시작한 지 언 3여 년이 지났다. 딱 부러지게 말해서 코칭 요가 즉 요가원에서 1년 10개월,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든 아무튼 홈트 요가는 1년 6개월 정도이다. 데이터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이과적 접근보다는 문과적 접근이 요가에 더 어울린다.
문과적 기간으로 계산하면 두리뭉실 2년이면 2년, 3년이면 3년 일 수도 있다. 그런데 특이점은 신체적 요가의 횟수는 아마 후자의 기간이 더 긴 것 같다. 홈트 시절 (지금도 ~ing)의 요가는 거의 매일 1시간씩 꾸준히 하고 있고, 요가원 시절의 요가는 주당 2번 강도 높게 했지만 수업 없는 날은 수업의 위로 때문에 잘하지 않았고 또 초보 시설 몰라서 허둥대서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코로나 시대 체육시설 또한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업종에 하나일 것이다. 시장의 흐름은 온라인은 비대면의 홈트로, 오프라인은 비대면으로는 불가능한 기구 위주의 필라테스와 헬스로 양분되는 것 같다. 요가는 급속하게 필라테스로 흡수되는 것 같고 요가의 고유함은 비대면 방향으로 움직이는 면이 강하게 보인다.
비대면 요가의 장점은 시간과 복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과 개인의 마음가짐과 노력에 따라 신체적 측면의 발달을 도모할 수 있는 코칭 프로그램도 습득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자기만의 루트를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마인드 측면의 요가도 혼자 수련이 가능하다고 보면 두 가지 양측면의 수련을 조화롭게 경험했다면 충만해야 할 것인데 나의 요가는 왜 텅 비어있다고 느낄까?
이과적 요가는 홀로 익숙해지지만, 문과적 요가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요가의 특성이다. 요가는 수학과 과학에 의존도 하지만 문학과 언어와 문화와 철학적 요소에 그 근원적 출발점과 가깝게 태생한 수련이기 때문이다. 갈망과 목마름의 요가는 홀로 요가의 수련으론 해소할 수 없고 조화로움이 곁들여져야 그 공허함이 채워진다.
예전 요가원의 요가에서 운 좋게 느낌을 받은 그 충만감을 개인적 홈트에서 느껴보진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적막한 산에 홀로 氣을 받으며 새벽 요가에 몰입하면 모를까? 그럴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쉽진 않다. 요가 매트를 펴고 그 직사각형 안에 나를 방임하여도 매트의 보이지 않는 입구와 다리서 날 반겨주며 건너오게 하지만, 고독과 순수의 충만은 매트가 나게에 위임하지 않는다.
세월이든 계절이든 인연이든 지나가는 것들이 그저 지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 나의 요가는 비워야 할 것을 비우지 못해 있지 않는 상태로 잠겨있는 것인지, 채워야 할 것을 채우지 못해 아주 원래 없던 것이 되어버린 것인지, 어떻게 비우고 채울 것인지, 지우고 싶은 것을 어떻게 지울 것인지, 그 방향성을 찾아야 할 숙제를 요가 3년차에 마주 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너무 한낮의 연애 중에서, 김금희)
-2021년 늦여름 비 내리는 아침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