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I don’t wanna die without any scar
브래드 피트와 애드워드 노튼이 서로를 신나게 쥐어패며 바닥을 구르고 있다. 나는 불현듯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쏟아내리는 빗속에서, 동생과 내가 꼭 그들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는 눈밭을 만난 강아지처럼 달려나가 아파트 단지의 작은 언덕들과 아무도 없는 학교의 농구장 바닥을 온종일 뒹굴곤 했다. 열을 잔뜩 머금은 초록색 고무 바닥과 잔디가 비를 만나며 쏟아내는 진한 초여름의 내음 같은 것이 그곳에 있다. 우리는 차가운 진흙을 서로에게 뭉쳐 던지고, 미끄러운 몸을 거침없이 바닥에 넘어뜨린다. 거친 호흡과 부딪힘, 흐르는 땀방울과 물 웅덩이의 비릿한 짠 내가 뒤엉키는 곳. 나는 종종 움직임을 멈추고 잠을 깨우려는 듯 부드럽게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의 촉감을 한동안 만끽한다. 이윽고 차가운 빗물 한 줄기가 짧은 머리칼과 얼굴을 천천히 흐르며 온기를 품고, 끝내 입술 끝으로 스며 사라진다. 나는 다시 이곳에 있다. 스타벅스 2층의 창가 자리. 찍어낸 듯 하나같이 축 처진 표정들 속, 20대 후반의 남자가 구부정한 자세로 화면을 응시한다.
적당한 온도의 매장, 적당한 정도의 웅성임, 적당한 높이의 책상과 적당한 풍미를 담은 커피. 그리고 꽤나 만족스러운 샌드위치 메뉴들. 어느 날부터인지 동네에 새로이 생겨나는 카페들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형편없는 커피와 불편한 좌석, 그리고 수시로 끊어지는 와이파이 따위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인상에 크게 좌우되며, 종종 스스로조차 당황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나의 취향에 꼭 맞아떨어질 카페가 어딘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휴일의 소중한 몇 시간, 혹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하루의 마무리를 함부로 베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새로운 일을 기대할 수 없는 지루한 어른의 삶. 그것은 마침내 나에게도 손을 내밀어 온 것이다. 나는 불과 조금 전 생동하던 이미지가 이미 나의 삶과 너무 멀어져 버렸으며, 바로 그 이유로 앞으로도 수차례 같은 장면을 떠올릴 것임을 인지한다. 어쩔 수 없지 뭐. 하루 식비에 육박하는 가격의 그란데 사이즈 자몽 허니 블랙티 한 잔을 순식간에 반쯤 비워낸 후, 이제는 나의 터전이 된 이곳을 찬찬히 둘러본다.
오직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공기가 있다. 시험기간 독서실의 꿉꿉함, 전시회장의 고고한 구두굽 소리와, 새로 오픈한 카페 곳곳으로 어수선히 번지는 설렘의 기운. 콘센트와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장소의 구성원들은 호기롭게도 그것들을 모두 어우르는 어떤 공기를 자아내려 한다. 잔뜩 찡그린 것도, 그렇다고 아주 여유로운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주춤이며 엉덩이를 들썩인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단념하고 적당함에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 친애하는 나의 동지들. 나는 이들을 스타벅스형(形) 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스타벅스형 인간들은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와 함께 탄생한 전혀 새로운 존재들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해온 한, 그들은 이름에서 이름으로 끊임없이 거처를 옮겨왔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거창하지 않다. 소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저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다. 최선이 아니어도 좋으니, 다소 평범해도 좋으니 실패만은 피하고 싶다는 그들의 오랜 염원은 오늘날 각지의 스타벅스에 터를 잡은 것이다.
‘누구든 결국 어딘가에서는 멈추어야만 한다.’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스타벅스형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새로움을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던, 그러므로 항상 새롭고 생동감 넘치던 나날들. 틈만 나면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 들며 씁쓸한 웃음과 함께 특유의 통달한 듯한 눈빛을 번뜩인다.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열정적이고 무모한 도전일수록 과거는 그 빛을 더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당시 ‘얼마나 열성적이었던가’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던지’이다. 그곳에 닿지 못한 까닭이 다름 아닌 본인의 부족함이었다는 사실은 스타벅스형 인간들을 가장 큰 고통에 빠뜨린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절대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철이 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진동하던 비 냄새와 보물 지도처럼 정강이를 가득 채우던 흉터들. 어린 날의 상처들에 대해 생각한다. 스타벅스에서는 상처가 생길 일이 없다. 둥근 책상 모서리에 팔꿈치 위쪽을 세게 부딪힌다거나, 계단에서 발목을 접질리는 정도로는 몸에 상처를 남기지 못한다. 모름지기 상처란 넘어지고, 구르고, 온몸을 쓸어내야만 비로소 검붉은 피를, 쉬지 않고 온몸을 순환하는 그것을 살아있음의 증거로서 내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를 보였던 상처는 언제였던가. 자전거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며 무릎과 정강이에 커다란 멍과 함께 남았던 끈적이는 검 붉은색 자국을 떠올린다. 사실 자전거를 타는 활동을 제외하면 내 삶에 이미 상처를 만들 일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자전거를 타지 않게 된다면 이마저 머나먼 기억으로 멀어질 테다. 더 이상 상처를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람들. 스타벅스형 인간이란 다만 차분히 벽돌을 쌓아 올리듯, 안온한 부드러움을 조금씩 삶에 더해갈 뿐이다.
새로운 것을 감각하고 갈망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동반하고, 실패란 크건 작건 인간의 마음과 육체에 생채기를 남긴다. 상처를 훈장처럼 늘어놓으며 아이처럼 뿌듯해하는 일은 어쩌면 응당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의 실패를 원하지 않음과 동시에 생생한 상처를 원한다. 그러나 많이 지쳐버렸다. 변화와 모험, 무수한 가능성과 같은 단어들은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지만 이미 그것을 자신과 연결시킬 힘이 남아있지 않다. 상당한 갈래의 길을 걸어오며 얻은 피로와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한다. 그런 건 책임질 것이 적을 때나 할 수 있었던 철없는 이야기라고, 지금의 모습이 나에겐 최선이라고 말이다.
내가 꾸려온 삶의 방식과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그에 맞는 일정한 생활 수준의 유지를 추구한다는 것. 더 이상 더하고 뺄 것 없는 정확한 보통의 상태를 결정하고 끊임없이 갈고닦는 여정.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따금 자신만의 삶의 공식을 훌륭히 완성시키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존경심과 함께 어떤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열렬한 스타벅스형 인간의 한 명으로서, 나는 끝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정말 나의 최선인가. 나는 나의 삶에 충분한 피와 상처들을 남겼는가. 상처 하나 없이 죽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 예외 없이 스타벅스형 인간들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놓는 이유다.
Fin.
From the E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