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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Nov 29. 2022

바닷마을 판타지

[East] 너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

바닷마을 판타지



헤어짐


우리에겐 마지막 순간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 이것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말들을 왈칵 쏟아내던 날마저 우리는 줄곧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한 번의 헤어짐을 겪고, 정해진 일인 듯 다시 만나고, 오지 않을 것 같던 이별을 맞을 때까지 다시 일 년이 걸렸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5월의 바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 즈음의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했다.


오랜 동안 서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날들이 그렇게 툭 끊어졌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는 같은 속도로 초침을 움직이고, 나는 대체로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생활했다. 이별을 좀 했다고 하여 사는 곳의 천장이 갑자기 무너진다든지, 지구의 자전 방향이 반대로 바뀐다든지 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한동안 주변을 서성였을 뿐이다.


실컷 울어보지 못한 것이 이내 마음에 걸렸다. 처음 이별을 말하던 날, 너의 마지막 말을 미처 듣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고, 그날따라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기차역 화장실에서 나보다 급한 용무로 인상을 찌푸리고 발을 구르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마주하자 결국 울음 대신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래 눈물이야 뭐, 참으려고 하면 참을 수 있는 거니까.


그때 실컷 울어버리지 못한 탓으로, 그것을 보상하듯 오랜 기간에 걸쳐 난데없는 순간에 휘청여야 했다. 역시 나는 그날 엉엉 울어버려야 했는지 모른다. 너의 앞에서, 차가워진 손을 몇 번이고 부여잡으며,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만큼, 지금 느긋하게 똥이나 싸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며 말이다. 제때 배출되지 못한 눈물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뜨거운 무언가로 변한다. 나는 며칠간 그것이 내 몸속 어디즈음을 지나는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와 울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은 이미 내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나는 아마 평생 이것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할 거다.


종종 너를 다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한다. 정말 마지막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나의 미성숙함을 사과하고, 미처 보이지 못한 눈물을 서로에게 비추어도 좋겠다. 마지막인데 뭐. 그리고는, 깔끔하게 안녕. 우리는 완결을 짓지 못했으니까. 그러고 나면 전보다 한결 가볍고 간결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소망을 가지곤 하는 것이다. 다소 이기적이며 부질없는 바람인 줄 알면서도.


바닷마을 빵집


너를 실제로 마주한 것은 이미 그 모든 장면들과 상당한 거리감을 확보한 이후였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어버릴 참이었으니까, 역시 적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망설임 없이, 부지런히 우리를 앞으로 밀어내는 동시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기도 한다. 너는 진열장 맞은편에서 빵 고르기에 열중하고 하고 있다. 그래, 너는 어릴 적에도 빵을 참 좋아했었지.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 이 상황이 쉽게 수긍되지는 않는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내가 수긍하는지 어떤지가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동해바다에 인접한 작은 동네, 잠시 혼자 떠나온 여행에서 역시 혼자인 너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와 모른 척 가게를 나가버리기에, 우리 둘에겐 다시 내려놓아야 할 빵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너는 이미 나를 먼저 발견했는지 모른다. 이런 쪽으로는 항상 나보다 한발 민첩했으니까. 몇 년 전에 이런 상황이 있었더라면 그때의 나는 참 기뻐했을 텐데, 막상 떠오르는 감정이 의례적인 곤란함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슬퍼진다. 너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까운(가까웠던) 사이라면 대개 그렇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때도 그런 걸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부질없는 상념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너는 어느덧 고개만 살짝 들면 눈이 마주칠 거리까지 다가온다. 결국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채로,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른다. 역시 너는 많이 놀라지 않는다.


“은수야.”

“응, 나 말이야?”

“그래 너. 어떻게 지냈어?”


‘제발 다시 돌아와 줘’ 류의 극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각자 새로운 사람과의 안정적이며, 만족스러운 관계가 있었고, 그런 대사를 읊조릴 만큼 뻔뻔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났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우리는 충분한 기간 서로를 겪었고, 그 후로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후 몇 초간 습관처럼 수년 전에나 어울릴 법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금세 현실로 돌아와 누구와 나누었어도 무난할 만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그럭저럭 잘 있다고 했다. 한때 나를 퍽 따랐던 동생도, 부모님도 모두 무사히 잘 지낸다고, 시간이 옛날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가능한 간략한 근황을 전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줄곧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참 좋은 대화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은 무엇인가 하는 어중간한 침묵이 시작되기 전, 이렇게라도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다는 인사와 함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내가 먼저 빵집을 나섰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함께한 시간 동안 미안했다는 말을 꼭 전하리라 다짐했던 것을 떠올렸지만 역시 그만두었다. 이제 다 괜찮다는 말도, 무엇이 미안했냐는 질문도 듣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각자 버전의 우리를 가질 권리는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닐 테다. 너는 조금 더 머무르다가 나가겠다고 했고, 나는 아마 마지막일 너의 얼굴을 가능한 담백한 마음으로 눈에 담았다.


애틋함


내가 묵고 있는 모텔은 주변에 비해 높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덕에 언덕 아래 위치한 빵집에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해변까지 펼쳐진 대부분의 길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게걸스레 집어먹던 빵을 내려두고, 네가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잠시 너를 바라보며 담배를 하나 피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 거의 직후, 마침 네가 빵집을 나선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역시 조금 이른 타이밍이다. 너는 아마 나와 함께 나오는 것을 피하고 싶었으리라. 함께 어떤 장소를 나서고 나면 어딘가를 향해 함께 걸어야 할 것이고, 그건 우리의 오랜 습관이었으니까, 우리는 필요 이상의 시간을 함께하게 됐을 거다.


너는 조금 헤매는 듯, 혹은 휘청이는 듯 서성이다 곧 해변을 향하는 듯했다. 이미 얼굴을 분명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직 너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천천히 담배를 태우며 가만히 너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씩 눈이 시려올 무렵, 마침내 해변에 도착한 너는 어느 사이 하나의 점이 되어있었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점. 어쩐지 앞으로는 언제라도 다른 점들과 너를 분명히 구분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들었다. 하지만 담뱃재를 털고 새로운 담배를 가지고 오는 사이, 너는 다른 점에 완벽하게 섞여버렸다. 빵집에서의 난데없는 조우가 아니었다면 같은 시간에 창밖을 유심히 내다본다 해도, 점들의 움직임에 네가 섞여있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듯이.


나는 작게 일렁이던 너의 뒷모습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럭저럭보다는 조금 더 잘 지내길, 혼자 떠나온 해변에서 찾으려 했던 것에 닿을 수 있었기를 바란다. 물론 이건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마 영원할 수 있을 테다. 어느 봄날, 익숙한 액체의 흐름을 몸 구석구석 다시 한번 느낀다. 한동안 세상의 전부이자 마지막이던 너에게서 떨어져 나오던 날 자연히 태어나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었던 감각. 눈밭 멀리 작은 새를 바라보는 두 눈을 시리다가도 울컥 뜨겁게 혀뿌리를 덥히는 것. 나는 끝내 이것을 떨쳐내지 못할 거다.



Fin.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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