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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Dec 07. 2022

미완(未完)

[West] 너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

미완(未完)



끝. 지금껏 그려온 삽화 외에 어느 장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이 말은 늘 아리다. 때문에 혼자서라도 뱉고 싶지 않았다. 아득히 먼 곳에서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릴 때면 부러 외면했다. 하지만 날 선 끝의 숨소리가 이내 선명히 들려왔고, 나의 인정이나 부정와는 무관하게 끝의 다다름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우연히 만나 함께하는 손톱만큼의 여정. 서로 다른 삶이 하나의 점에 모인 순간이 가지는 유한함을 알기에, 어느 시절이나 사람 또는 마음을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면 사소한 끝일지라도 어김없이 끙끙 앓았다. 며칠 전 짤막한 여행 막바지에 바라본 노을 진 한강 풍경마저 무서웠다. 끝이란 대개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불쑥 찾아온다는 걸 배운 탓에 연거푸 깊은 숨을 뱉었다.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제든 재현할 수 있는 만남이라는 위로에도 정말이지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날까 불안을 쉬이 잠재우지 못했다.


끝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그것은 서늘하고 선명한데, 맞닿은 몸의 온기가 떨어져 나가는 촉감과 닮아있다.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일종의 통각과도 같았다. 그래서 모든 상실이 아팠다. 아프다는 말 말고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아픔과 슬픔으로 몇 밤 뒤척이고 나면 애틋함이라는 감정이 포개어졌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맺힌 듯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애틋함의 실체를 추적하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미완(未完)이라는 말에 도달했다. 다 지어지지 못하고 멈춰진 채로 도시의 흉물이 된 아파트, 더는 아무도 건너지 않는 교각, 아무 인적도 남지 않은 공실, 적지 못한 답장과 기록되지 못한 마음 같은 것들…. 그리고 풍경들은 곧 눈이 내리던 미산마을의 어느 밤으로 이어진다. 어떠한 형상도 되지 못한 채 영원히 남아있을 미완(未完)의 마음이 그곳에 자리를 틀었다.


한 인연이 있었다. 그와 떠난 여행은 온통 완성되지 못한 것 투성이었다.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폭설이 내린 건 어렵게 맞춘 날짜에 혹시나 변수가 발생할까 조마했던 마음과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풀었던 기대, 그로 인해 때때로 생겨난 서운함에 이르는 온갖 감정을 마주하며 겨우 맞이한 여행의 전날이었다. 우리는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잠시라도 함께 떠날 수 있을까. 함부로 다음 여행을 기약할 수 없던 사이에 하필이면 깊은 산골로 숙소를 잡은 까닭에 밤새 마음을 졸였다. 10분, 1분, 어느새 10초 단위로 기상청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건 정작 가까스로 여행을 떠날 수 있던 다음날 많은 것들을 못하게 했다. 늦은 저녁에야 도착한 숙소에서는 다운로드한 영화나 서점에 들러 구매한 만화책도 다 보지 못한 채로, 호일로 꽁꽁 감싸 아궁이에 넣어두었던 감자를 맛보지도 못한 채로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욕심을 내어 떠나왔던 미산마을의 풍경 앞에서 우리는 사진 한 장만 겨우 찍고서 체크아웃 시간에 쫓겨 돌아나왔다. 어릴 적부터 동경해온 눈 내린 자작나무숲을 들어가지 못했으며, 나무 사이에서 꼭 묻고 싶었던 얘기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계획했던 것들 중 제대로 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이튿날 우연히 보게 된 한밤중의 불꽃놀이를 비롯해 그해 겨울 여행은 소박한 행복과 평생 간직할 추억 몇 가지를 남긴 채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그 여행이 유독 미완(未完)의 시간으로, 그때의 인연이 유난히 애틋한 대상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완결을 보지 못한 만화책이나 들어가지 못한 자작나무숲 따위는 아니다. 고백하자면 여행 이후 조급하고 부박한 욕심을 가졌고, 잘못 조여진 나사못을 닮았던 그와의 관계는 점점 더 삐걱거렸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그해 겨울에 존재했던 상대의 노력을 알면서도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다. 함께했던 삼 일의 여행이 내겐 함부로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했다는 마음마저도 전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아주 우사스러운 일로 상대와 나는 거세게 틀어졌는데, 그때의 난 ‘이 관계에서 패자가 될 수 없다’는 아집을 지닌 채 우악스럽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기어이 모든 종류의 빚과 약속을 정리한 날, 더 이상 둘 사이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한번 우연히 함께 길을 걸었던 날이 있다. 어둠이 내리는 육교를 건너며 상대는 질문 하나를 했다. 그건 내가 애써 피하고 있던 성격의 것이었다. 거기서마저 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는데, 그건 진실을 말하는 것과 둘 사이 관계를 회생시키는 것 사이에서 어떤 답이 적절할지 끝내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질문에 어떤 답을 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때의 주저함은 어떠한 맺음도 없이 무수한 경우의 수만 남겨둔 채로 관계를 끝으로 이끌었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인연을 떠올릴 때면 오로지 ‘애틋함’이라 이름 지을 수 있는 감정만이 메아리친다.


그런 마음에 체해 겨울볕을 따라 낡은 관람차 하나가 높다랗게 서있는 바다마을로 향한 적이 있다. 관람차의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선을 그으면 작고 낡은 선착장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관람차매표소 아저씨는 그곳 끄트머리에 이별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 말했다. 간혹 술인지 슬픔인지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바다에 하소연하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그늘진 얼굴로 홀로 바다마을을 찾은 사람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단조로운 일상에 이야깃거리 하나 기대하는 마음이었을까. 아저씨의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넘어가는 해가 빚은 그림자를 밟으며 한참을 걸었다. 도착한 선착장 끄트머리에는 시커먼 따개비와 비릿한 바다내음, 부서지지 않는 파도와 고요만이 전부였다. 누군가 들이부었을 술병도 허망하게 앉아있는 인영도 없었다. 오늘 이별한 사람이 없었을 수도, 혹은 시시껄렁한 아재의 장난이었을지도.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해안가의 주홍 불빛을 따라 사람들이 보이는 골목 안쪽으로 돌아나왔다. 몇몇 횟집 앞 손짓을 무시하고 작고 어두운 우동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춧가루를 잔뜩 풀어 오물거리다 금세 나와 마을 구석 교회 앞을 지나며 오늘도 매듭짓지 못한 모든 끝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다.



Fin.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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