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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2), 구시가 강변 산책

모트와바 강변정담,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하여 28

새아침이 밝았다. 모든 아침은 매일 매 번 다르지만 여행자의 아침은 늘 유독 새롭다. 말보르크 가는 날만큼 화창한 날이었다. 


"엄마, 동유럽 겨울 그러니까 폴란드 겨울은 우리나라 겨울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폴란드는 그렇지 않고, 우리나라는 국토 70%가 산악지대고, 폴란드는 국토 75%가 평원인데다 위도도 다르니 아무래도 기후가 많이 다르겠지. 왜, 많이 추워, 어린이?" 

"아니, 그게 아니라 추운 건 괜찮은데 햇살이 쨍해서 얼굴하고 손등이 타. 맨 처음 폴란드 왔을 때보다 탔어. 춥고 바람 많이 부는 겨울에 얼굴이 까매진 적은 처음이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연짱이는 얼굴이 좀 탄 정도지만 나는 기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바람에 매우 당황하였다. 더운나라도 아니고 한겨울날 동유럽에서 기미 걱정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터라, 선크림과 마스크팩 몇 장 말고는 자외선에 대한 대비 자체를 안 해와서 더 그러하였다. 겨울 동유럽의 쨍한 자외선에, 머리카락마저 바스락 건조하게 만드는 숙소의 난방형태까지 더하여져서 염개미의 기미는 여행 내내 마른버짐처럼 넓게 피어 번졌다. 그렇다고 한겨울에 썬캡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맑고 쨍한 한겨울 하늘과 호흡 뿐 아니라 머리속 마저 환기시키는 청량한 대기를 누리는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불평은 잠시 넣어두기로 해.


오늘 본격적으로 그단스크 구시가를 탐험해보기로 하였다. 연짱이는 매 도시마다 구시가를 걷고 또 걷는 엄마를 매우 못 마땅해하는 편이다. 먹이지도 않고 사진만 찍게 부려먹고 하루에 2만보씩 걷는다고. 거짓부렁쟁이 연짱이. 중간 중간 먹은 퐁첵이 하루에 몇 개며, 먹은 로디가 하루에 몇 스쿱이냐 정녕. 


"열심히 걷다보면 호박거리가 나오거든. 거기서 호박펜던트 사줄게" 

"오호!"  


그렇게 에미는 미끼를 떤져분 것이고 연짱이는 그 미끼를 덥석 물어분 것이여. 


연짱이도 염개미도 참 좋아하였던 모트와바 강변 산책로로 향하였다. 구시가의 시작은 대부분 바르비칸(BARBIKAN) 혹은 망루(BASZTA)로 시작된다. 


그단스크 구시가 초입에 있는 바쉬타(BASZTA). 

바쉬타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여러 방향의 구시가 입구에서도 바슈타를 볼 수 있다. 


할라 타르고바. 그단스크 중앙 재래시장. 


브라마 비진나(BRAMA WYZINNA). 

아침부터 손시렵다고 심통난 연짱 포토그래퍼가 앞면(서쪽면)을 찍어주지 않아서 뒷면(동쪽면)이다. 브라마 비진나는 '높은 문' 이라는 뜻. 얀 크레이머(JAN KRAMER)의 설계에 따라 1574년에서 1576년 사이에 지어졌다. 1588년 조각가 빌헬름 반 덴 블록(WILHELM VAN DEN BLOCKE)이 프로이센, 폴란드 그리고 그단스크의 문장과 부조를 문에 새겨넣었으며, 문 위쪽에 4개의 사자 조각상이 있다. 사진이 뒷모습이라서 그렇지, 앞 모습에 1588년이라고 쓰여있고 3개의 라틴어 문장 역시 볼 수 있다. 


“Iustitia et pietas duo sunt regnorum omnium fundamenta” 

“Justice and devotion are the foundations of all kingdoms”

정의와 헌신은 모든 왕국의 기초다. 


“Civitatibus haec optanda bona maximae: pax, libertas, concordia” 

“The goods most desired by societies are peace, freedom, harmony” 

사회가 가장 바라는 선은 평화, 자유, 조화다. 


“Sapientissimae fiunt omnia que pro republica fiunt” 

“The wisest deeds are those done for the Republic (of Poland)”

가장 지혜로운 행위는 폴란드공화국을 위해 한 일이다. 


뒷면(동쪽면)은 빌헬름 반 덴 블록이 새겨넣은 초기 부조에 기초하여 1884년 재설계된 것을 기념하여 새겨넣은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을 어기고 폴란드 그단스크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나치 독일은 소련에 밀려 그단스크 점령지에서 퇴각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단스크 도시 대부분이 소련군에 의해 부서지고 무너져내렸다. 지금의 모습은 전후 복구된 모습이며 브라마 비진나는 현재 관광객을 위한 INFO 센터로 쓰이고 있다. 


염개미가 그렇게도 궁금해하던 브라마 즈워타(BRAMA ZŁOTA). '황금의 문.' 

어찌 들어오고 나갈 때 양면을 다 찍을 생각을 못 했나 몰라. 각각의 면에 새겨진 금빛 격언 내용과 조각상이 다른데. 사진에서 보이는 면은 드우기거리(ULICA DŁUGA)를 등지고 바라본 면, 그러니까 동쪽면이다. 문에는 라틴어 문구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Concordia res publicæ parvæ crescunt – discordia magnæ concidunt." 

"By concord small republics grow, because of disagreement great republics fall" 

화합은 작은 국가를 성장시키며 다툼은 위대한 국가도 무너뜨린다. 


브라마 즈워타는 아브라함 반 덴 블록(ABRAHAM VAN DEN BLOCKE)이 설계하고, 얀 스트라코프스키(JAN STRAKOWSKI) 의 지시로 1612년에서 1614년까지 건축되었으며, 현재는 중세 때의 기초와 북쪽 벽의 일부만 남아있다. 브라마 즈워타 위쪽 8개의 석상은 예레미아스 팔츠크(JEREMIAS FALCK)가 1648년 제작한 것이다. 그 후 세월의 풍화에 손상된 석상은 1878년 피오트르 링게링(PIOTR RINGERING)과 얀 카스파 고켈러(JAN CASPAR GOCKHELLER)에 의해 세라믹 사본으로 대체되었다고. 그단스크 구시가는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역시 그 때 심각하게 손상되었던 브라마 즈워타는 전후인 1946년 복원이 시작되어 전면 재건공사는 1957년 이루어졌다. 또한 금박 등 전면 장식의 보존 작업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수행되었다. 브라마 즈워타를 통과하면 그단스크 구시가 중심거리인 드우기거리(ULICA DŁUGA)가 이어지는데, 드우기거리는 긴 거리(LONG LANE)이라는 의미이자 그단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로얄 루트(ROYAL ROUTE)' 이기도 한다.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반대면 즉, 서쪽면에는 전후 재건작업 당시 없앴다가 1990년대에 다시 복원시킨 독일어로 된 시편 122편이 새겨져 있다. 


"Es müsse wohl gehen denen, die dich lieben. Es müsse Friede sein inwendig in deinen Mauern und Glück in deinen Palästen" 

"They shall prosper that love thee. Peace be within thy walls, and prosperity within thy palaces" 

너를(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 


이토록이나 지극한 축복을 받는 도시라니 나는 그단스크가 몹시 부러웠다. 부지런한 열혈인들 사는 나의 도시 서울,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도시마다 이와 같은 축복이 내리기를. 


Concordia(화합Agreement), Iustitia (정의Justice), Pietas (경건함Piety) 그리고 Prudentia (신중함Prudence)를 상징하는 조각상. 반대편, 그러니까 서쪽면에는 Pax(평화Peace), Libertas(자유Freedom), Fortuna(부Wealth), 그리고 Fama(명성Fame)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다. 


8개의 조각상이 상징하는 바는 이상적인 시민의 자질이라는데, 이 정도면 이상적인 시민을 넘어서 이상적인 인류의 자질 혹은 인류가 갖추고 싶은 이상 아닌가? 게다가 이 문을 지나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서 나는 그단스크에 있는 내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문을 지나다녔다. 꼬옥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꼬옥.  


브라마 즈워타 통과. 염개미님께서 억만장자를 득템하였습니다. 황금이여 내게로, 내게로! 


길 가운데 멀리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시청사. 시청사가 보이는 거리가 드우기거리이고, 그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드우기 광장(DŁUGI TARG SQUARE)이 나온다. '로얄 루트'라고도 부르는 그단스크 메인거리와 메인광장이다. 


어느 시간 어느 각도로 봐도 아름다운 그단스크 시청사.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오후 2시 좀 넘은 즈음부터 오후 4시가 다 될 때까지 구 시청사 어딘가에서 음악이 나온다. 뭔가 헨델의 교회음악 같은 느낌이어서 연짱이와 나는 시청사 주변을 벗어나지 않고 두 시간 가까이 그 경건한 음악을 들으며 걸어다녔다. 


드우기 광장(DŁUGI TARG SQUARE). 사진 속 정면을 향해 걸어 브라마 지엘로나를 통과하면 모트와바(MOTŁAWA) 강변 산책길이 나온다. 


정면 아치형 통과문이 있는 곳이 브라마 지엘로나(BRAMA ZIELONA). 녹색문. 

그단스크 최고령 수문으로 추측된다고. 현재는 그단스크국립박물관 분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현재 전시 중인 미술작품 광고를 전면에 걸어두었다. 


"이게 어딜 봐서 녹색문이라는 거야. 진짜 이름 막 짓네." 

"이봐라, 어린이, 그렇게 따지면 높은 문은 다른 문에 비해 높지 않고, 황금의 문도 황금색은 아니다." 


브라마 지엘로나는 네덜란드 매너리즘 초기형태를 알 수 있는 건축물로 네덜란드 건축가 레니에(Regnier)와 독일 건축가 얀 크레이머(Jan Kramer)가 1564년에서 1568년 동안 폴란드 왕의 주거를 목적으로 세웠으나, 왕이 거주한 적은 없었다. 1646년 마리 루이즈 곤자가(Marie Louise Gonzaga)가 브와디스와프 4세와 결혼하러 오는 길에 잠깐 머문 적은 있다고. 과거 무기고와 박물관으로 쓰인 적이 있었고 임시 전시회, 다양한 유형의 회의, 쇼가 이곳에서 개최된 적도 있었다. 그단스크 구시가 다른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의해 대부분이 부서졌다가 전후 복구되었다. 브라마 지엘로나 2층은 2015년 유럽연대자유노조센터 자리로 이전되기 전까지 폴란드 제3공화국 대통령 레흐 바웽사의 사무실로 쓰였으며, 현재는 그단스크 국립박물관 분관이 자리하고 있다. '녹색문'이라는 이름은 녹색 색조의 원석을 사용하여 건설한 근처의 지엘로나 다리(ZIELONA BRIDGE)와 관련이 있다고. 


연짱이 말이 어떤 면에서는 맞긴 하다. 브라마 지엘로나 건축물 자체는 녹색 기운이 하나도 없으니까. 


모트와바(MOTŁAWA) 강. 모트와바 강은 비스와(WISŁA) 강의 지류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그단스크는 비스와 강변도시라고 봐야 한다. 토룬과 바르샤바를 흐르는 비스와 강이 그단스크까지 아우르며 흐르는 것이다. 이 강변산책로는 유럽 강변풍경은 이렇구나, 생각이 들만큼 참 예쁘다. 


연짱이와 도란도란 푸른 강변로 계속 산책해볼까요. 


브라마 흘레브니츠카(BRAMA CHLEBNICKA). 

빵의 문(BREAD BENCHES GATE 또는 BREAD STALLS GATE). 145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빵의 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 때 빵을 팔던 곳이다. 그단스크 모든 관문 중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며 또한 현재 그단스크에 남아 있는 3개의 후기 고딕 수문 중 가장 오래된 곳이기도 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왕관 없는 빨간색 방패에 두 개의 은색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그단스크를 상징하는 문장은 그단스크에서 가장 오래된 문장이며, 1457년에 추가된 것이라고. 그단스크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거의 다 부서지고 무너져내렸던 것을 생각해볼 때, 저 정도면 최상을 넘어 최고 최상의 보존상태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어, 저런 돌덩어리들이 원래 여기 있었나?" 

"엄마는 정말 아무리 주의력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 수가 있어."


비내리고 날씨 흐리던 며칠 전에는 못 봤던 돌덩어리들이어서 뭐지, 하며 들여다 보았다. 설명을 읽으면서 이건 뭐 닮았고 이건 설명 안 하면 모르겠고, 그러면서 연짱이하고 웃고 있는데, 그런 우리가 즐거워보였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평소에는 강변만 보고 지나가느라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돌덩어리들을. 


일명 '프러시아 할멈(PRUSSIAN HAGS)' 


고대 폴란드 영토에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부족들이 거주하였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민족이 고대 프로이센(OLD PRUSSIAN)이었다. 이 발트해안부족은 현재 폴란드의 포메라니아(POMERANIA) 주와 바르미아-마수리아(WARMIA-MASURIA) 주, 칼리닌그라드의 러시아 영토와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KLAIPEDA) 지역에 살면서 지금은 사라진 프로이센 언어를 사용했으며, 이교 프로이센 신화를 따랐다고. 사진 속 돌덩어리들은 몇 안 되는 기독교 이전 문화의 흔적으로 폴란드 북부 특히 브로노보(Bronówo), 가우도보(Gałdówo), 모즈고보(Mózgówo) 그리고 수쉬(Susz)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현지인들은 그 석상을 스타라 바바 프루스카(STARA BABA PRUSKA) 즉, '프러시아 할멈'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남성 형상이 대부분이어서 팔짱을 끼고 있거나 술잔을 들고 있기도 하다(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석상). 이들을 두고 어떤 역사학자들은 프로이센 신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부족 지도자의 석상이거나 묘비일 것이라 추측한다. 다른 학자들은 단순히 지역 사회의 경계 표시일 뿐이라고 여긴다고. 석상들의 정확한 유래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폴란드 영토의 새로운 지배자였던 튜튼기사단은 이교도였던 당시 원주민 부족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을 뿐, 고대 원주민들에 대한 기록이나 고대 문화 유물을 보존하는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땅의 지배자가 다른 민족, 다른 종족이거나, 우리의 옛 영토가 다른 국가령이면 안 되고 서러운 이유. 석상들은 주로 바르미아-마수리아 주에서 발견된다고. 나는 기독교 이전 고대문화와 신화, 민속학에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저 돌덩어리들은 꽤 흥미로웠다. 


핑크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일명 '프러시아 할멈' 이라고 알려진 석상. '이와브스키(IŁAWSKI)' 지역인 '모즈고브(MOZGOW)'와 '라세츠노(LASECZNO)'의 경계(폴란드 북부)에서 출토되었는데, 그곳은 중세 초 고대 프로이센 문화를 이룬 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나머지 돌덩어리들도 하나인가만 빼고 전부 고대 프로이센 문화를 이루며 살던 민족들의 땅에서 나온 것들이다. 


세월에 풍화되어 핑크색이 많이 바래져 있었던데다 날씨까지 엄청 화창하여, 다른 석상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색으로 보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핑크 화강암이라는 설명이 과장으로 느껴졌었는데, 지금 사진으로 보니 다른 석상에 비해 핑크빛이 감돌기는 하는구나. 설명문에서처럼 실제로 저토록이나 핑크 핑크하지는 않지만, 분홍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상은 맞다. 서기 900년 즈음 만들어진 말 그대로 고대 유물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핑크빛이 저 정도 남아 있는 것도 거의 기적 아닌가. 


"엄마, 나는 이 돌덩어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 뭔가 안정적이잖아. 목도 없고."   


목이 없어서 안정적인 돌덩어리여. 

너는 기막힌 듯 말이 없구나. 


브라마 마리아츠카(BRAMA MARIACKA). 마리아의 문.  

마리아 대성당(ST MARY'S BASILICA)이 있는 거리(마리아츠카 거리)의 관문이자 수문이어서 '마리아의 문'이다. 1484년 이전에 지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소련에 의해 완전히 부서져 내렸던 것을 1958년에서 1961년 동안 재건하였다고. 문 위의 폴란드 국장(가운데)과 프로이센 문장(왼쪽), 그단스크 문장(오른쪽)은 2006년 복원된 것이다. 


연짱이에게 이 문과 마리아츠카 거리는 마음 상해 걸었던 거리로 기억된다. 연짱이와 염개미는 브라마 지엘로나(녹색문)를 통과하면 나오는 많은 호박상점들 중 한 곳에서 호박펜던트를 하나씩 구입하여 목에 걸고 기분좋게 강변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리아츠카 거리에서 또 다른 호박상점들을 발견한 연짱이는 저 곳도 한 번 들어가보자, 하고 들어갔는데. 


"쳇, 내가 걸고 있는 호박펜던트보다 더 저렴하고 예쁜 것들이 많아서 완전 마음 상했어."  

"너는 녹색 호박펜던트를 원했고, 녹색이면서 호박 세공 모양이 예쁘고 호박을 물고 있는 은세공이 튼튼한 건 

 네가 산 것 말고는 없었잖아." 

" . . . . . . . "  


엄마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던걸까. 일단 원하는 물건을 산 다음에는 같은 종류의 물건을 또 물어보고 다니면 마음만 상하는 법이라는 것을 쇼핑이라면 질색하는 연짱이가 처음 알게 된 마리아츠카 거리. 


"어, 저 분 어쩐지 낯이 익은데. 역시 훔볼트 님 맞네."  

"그게 누군데?" 

"훔볼트 해류를 발견한 분이셔. 더 물어봐도 그 이상은 엄마도 기억이 안 나. 엄마는 지리를 매우 못 했거든. 그런데 저 분이 왜 여기 계시지?" 


염개미를 지리 열등생의 수렁에서 건져내주신 고딩 때 정군* 지리선생님 덕분에 귀에 익은 '훔볼트 해류'의 그 훔볼트 님을 여기서 뵈옵니다. 아, 훔볼트 해류는 발트해를 지나는 해류였구나. 


브라마 마리아츠카에 훔볼트 님이 계신 이유는 '그단스크자연과학학회(GDANSK SOCIETY OF NATURAL SCIENCE)' 때문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는 과학에 대한 그의 공헌이 인정되어 1840년 학회의 명예회원이 되었고, 그단스크자연과학학회가 위치하였던 건물과 브라마 마리아츠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인연 덕분에, 독일인 여행자이자 과학자였던 훔볼트를 기리는 기념패가 다른 문 아닌 이 문에 붙어 있다. 그단스크는 당시 독일령이었고 독일인들에게 그단스크는 '단찌히'였다. 

 

한 때 세계에서 가장 큰 크레인이었던 주라브(ZURAW). 

그단스크 번영기에 건축된 매우 특이한 모양의 목조 크레인으로 화물을 옮기고 배에 돛대를 설치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도시 방어와 관문 역할도 겸하였다. 11미터 높이까지 4톤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다고. 19세기 중반까지 제 역할을 하는 크레인으로 남아 있었으나, 제 2차 세계대전 끝무렵인 1945년 건축물의 80%가 파괴되었다가 전후 재건되어 현재 폴란드 해양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중세에 만들어졌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세계적으로 매우 희소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넵튠분수와 함께 그단스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라고. 


"연짱이, 엄마는 이 건물이 정말 좋아. 그단스크에서 제일 좋아. 아니 엄마가 아는 목조건물 중 제일 좋아." 

"왜?" 

"그냥 좋아. 처음 볼 때부터 좋았어. 완전 엄마 스타일이야." 

"그러니까 왜에?" 


세상에는 일일이 이유를 따져 물을 수 없는 가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전 재산을 들여 해외로 반출된 미술품이나 문화재를 사들이고 보존하는 행위, 돈이 안 되는 땅이라 메워버리고 간척지 혹은 택지나 만들면 좋을 것 같은 늪이나 뻘밭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행위, 그리고 다 부서지고 무너져내려 돌무더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폐허 더미를 끼워맞춰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행위가 그 가치 있는 많은 것들 속에 포함된다. 이러한 행위들이 가치 있는 이유는 생활에 이런 저런 불편을 준다거나 혹은 이익은 커녕 손해가 될지라도 개의치 않을 만큼 꼭 지키고 싶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진리와 신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제가치를 최우선적 잣대로 보는 사람들이나 낡고 부서진 것은 모두 흉물스러운 철거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너는 참 세상 복잡하게 산다, 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개념이다. 


주라브 뿐 아니라 고대, 중세 때 지어진 모든 조각상이나 건축물은 그러한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신념이 지켜낸 문화유산이다. 전란으로 부서졌으면 전부 허물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지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게 사료를 찾아 오래도록 연구하여 똑같이 공들여 복원을 해온 덕분에 많은 의미 있는 것들과 아름다운 가치가 보존되었다. 당신은 왜 그런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는가, 라는 질문은 타당하지 않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는 행동이 모여서 나 자신이 되고 내 삶이 되므로. 번거롭고, 불편하고, 손해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이 위태로운 줄 알지만, 그러고 싶어서 혹은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하는 숱한 일들 덕분에 수 많은 가치 있는 것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게 된 주라브처럼, 또 아주 크게는 나의 대한민국처럼. 


경제적 손익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우대받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세상 복잡하게 산다며 타인의 신념을 비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알고 지키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세상을 보고 싶다. 그것이 진리이고 순리라는 것을 당연한 듯 보여주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매 순간 바라고 바란다. 


주라브 모형. 

연짱 포토그래퍼에게 부탁하여 주라브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장 찍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모습들은 하지만, 나만 간직하기로 한다. 염개미는 욕심쟁이니까. 


어둠이 이르게 내리는 동유럽 겨울 오후 3시 즈음 모트와바 강변 산책길. '호박거리'이기도 하여 쌈지돈 털어 연짱이와 내 팬던트를 이 거리 상점에서 하나씩 구입하였다. 나는 전형적인 호박색깔인 노란색 호박팬던트를 골랐고, 연짱이는 오묘한 녹색 호박팬던트를 선택하였다. 나는 가격대비 만족하였지만 연짱이는. 


이곳은 무슨 관문일까. 


브라마 스트라가니아르스카(BRAMA STRAGANIARSKA). 행상의 문(VENDOR'S GATE). 

모트와바 강변 다른 문들과 마찬가지로 강쪽에서 도시로의 유입을 막는 방어와 수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전에는 '어부의 문(FISHERMAN'S GATE)'으로 불렸으며 1482년에서 1483년에 걸쳐 지어졌다. 다른 관문들과 비교하면 꽤 나중에 지어진 편이다. 그단스크 대부분의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 끝무렵인 1945년 심하게 손상되었다. 첫 복원 작업은 1952년 시작되었으며 1956년에서 1958년까지 남아있는 파편을 사용하여 재건하였다고. 


"문 이름을 보니까 아마도 옛날에는 어부들이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여기서 바로 팔았었나 봐. 물질해서 잡은 해삼이며 전복이며 해변에서 바로 썰어서 파는 우리나라 해녀들처럼. 그러다가 이런 저런 노점상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노점상거리가 만들어졌나보다." 

"여기는 호박상점이 없네." 

"연짱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호박에 집중해. 호박상점은 많고 예쁜 팬던트도 그만큼 많겠지만, 네 예쁜 목에 걸려 있는 팬던트는 그것 하나 뿐이잖아. 그러니 그 팬던트는 이제 세상에 하나 뿐인, 그래서 제일 예쁜 너만의 호박 목걸이인거야." 


이 때 염개미의 속마음은 '두 개는 못 사준다,' 였다. 


어찌 이곳에 회전목마를 둘 생각을 하였을까. 구시가의 중세 고딕건축물들과 회전목마는 참으로 잘 어울려서 흐린 날에는 구슬퍼서 좋았고, 맑은 날에는 옛 유원지 느낌이어서 좋았다. 


"앗, 해적선! 그디니아에서 본 그 해적선이야?" 

"아니야, 엄마, 이 해적선은 모트와바 강 유람이 주 목적인 것 같은데. 갑판 위에 전부 관광객이잖아, 누가 봐도." 

"강폭이 넓은 강을 끼고 있는 도시에서는 유람선이나 요트 관광이 가능하구나. 마차를 타고 궁전 주변이나 대표 관광지 돌아보는 것과 같으려나?" 

"엄마는 배 타고 도시 주변 돌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을 해. 현지인들 이용하는 유람선 타고 메콩강 노을 구경하고 그랬었잖아. 가이드 아저씨가 한국인 모녀 둘이 같이 유람한다고 소개하는 것 알아듣고 엄마가 일어나서 인사했던 거. 그거 불과 작년이라고. 불 꺼진 깜깜한 라오스 쪽 보면서, 전력사정이 국가 경제력을 말해주는 것 같다고 슬퍼했었잖아." 

"여기가 유럽이라서 유럽만 생각하느라 그랬지요. 마차 타고 궁전 주변 돌아보시던 꽃보다 멋진 할배들 생각이 나서." 


아, 그랬었다. 타이-라오 전용 이미그레이션을 유람선 선착장으로 착각하고 기웃거리다가 군인아저씨에게 주의 받았었지. 젊은 태국 고위군인들 영어가 유창해서 놀랐던 신선한 경험을 했었고, 도시 랜드마크에도 아낌없는 조명을 배치하여 밤에도 휘황한 태국 쪽과 달리 강변을 바라보는 몇몇 숙소에만 불 들어와 있던 깜깜한 라오스 쪽을 보며, 어쩐지 그 나라 국민들의 극악한 빈익빈 부익부를 보는 것 같아 슬펐었다. 연짱이에게는 '꽃보다 할배' 핑계를 댔지만, 겨우 1년 전 일을 그 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기억력 시든 할미 염개미. 


"대관람차 없는 폴란드 도시를 찾는 게 훨씬 쉽겠어, 엄마." 

"그러게. 대관람차에 이토록이나 집착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 정말. 성수기에는 사람들이 막 줄 서서 타나?"  


궁금증은 내일 확인해 보기로. 사랑하는 주라브도 내일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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