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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3), WONDERFUL TONIGHT

드우기(DŁUGI)광장, I HOPE TO SEE YOU SOONER29

세월이 쏜살 같다거나 손가락 사이로 샌다거나 하는 말들. 염개미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빨리 가서 좋은 일은 없으므로. 안타깝게도 여행자에게 배정된 시간은 일상에서 흐르는 시간의 1.5배속이라 폴란드에 도착한 첫 날을 제외하고 내 모든 세포는 마지막을 카운트 다운하는데만 집중되어 있었던 느낌이다. '마지막' 이라는 말이 주는 정서가 너무 무거워서 들숨과 날숨의 입자와 입자 사이를 채우고도 모자를 행복의 시간들을 그냥 놓치고 흘러보낸 건 아니었는지. 시간은 흐르는 것이 당연한 인지상정인데, 바꿀 수 없는 사실을 두고 나는 괴로워하느라 현재를 즐기지도 현재에 속해있지도 못한 채 아직 오지 않은 여행 마지막이라는 미래를 당겨 살고 있었나 보다. 'SEIZE THE DAY.' 'CARPEDIEM.'  모두 다 안 되는 바보가 여기 있다. 폴란드 도착하여 한 달 동안 하나라도 더 보겠다고 잔뜩 긴장한 채 하루가 짧도록 구시가며 성당이며 이런 저런 박물관이며 얼마나 누비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뭘 봤는지 뭘 들었는지 뭘 알았는지 크게 남은 것도 없다. 여유 없는 조급한 여행은 오래 남을 긴 기억도 행복한 순간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여적 터득하지 못하다니 배낭여행 15년차 참 무색하구나. 


"엄마, 오늘도 구시가 산책이지?" 

"응. 마지막 날이니까. 구시가 어느 쪽을 가 볼까?" 

"엄마는 주라브를 가장 좋아하니까 주라브 쪽 강변 산책하고 오늘은 도개교 넘어가보자.  그리고 거기서 와플 사주세요." 

"대관람차 있는 거기서? 꼭 유원지에서 유원지 가격 내고 먹고 싶어하더라 너느은." 

"유원지 가격 내고 먹어야 또 유원지 맛이 나는 건데 엄마는 참 아무 것도 몰라." 


아무 것도 모르는 분위기 꽝 엄마와 유원지 분위기를 사랑하는 분위기 탑 딸내미는 오늘도 구시가로. 


그단스크 중앙역. 

이곳은 기차역이고 사진에는 나오지 않은 뒤편이 버스터미널이다. 바르샤바 뿐 아니라 크라쿠프 그리고 그단스크 중앙역에 소매치기가 출몰한다는 글을 읽었다. 서유럽 주요 도시 중앙역 만큼은 아니겠지만, 사람 많이 모이고 붐비는 중앙역은 늘 요주의 장소라는 것만 염두에 둔다면 큰 사건사고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자브카(ZABKA). 

폴란드 전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편의점 체인이며 거짓말 조금 보태 거의 한 집 걸러 하나씩 있다. '자브카 카페'는 매장이 넓은 우리나라 편의점처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한 켠에 마련되어 있어서 갓 내린 원두커피를 마실 수 있고, 따뜻한 핫도그나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스낵도 먹을 수 있다. 다른 자브카 카페와 달리 입구 위에 새겨진 부조가 고풍스러운 그단스크 드우기 거리의 자브카다워 보였다. 연짱이는 '중세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진 토룬을 가장 좋아하였지만, 나는 우치처럼 신생도시라고 불리는 몇몇 도시 말고는 폴란드 대부분의 도시가 고색창연한 중세도시라고 생각한다. 토룬처럼 굳이 중세도시라고 지칭하지 않아도 토룬 만큼, 그리고 크라쿠프 만큼이나 그단스크도 오래되어 고풍스러운 도시다. 염개미에게 폴란드는 21세기 첨단 동시대를 멋지게 살고있는 중세국가였다. 


시청사 역사박물관 입구. 

그단스크에서는 그 동안의 빡빡한 투어 노동에 지쳐 올리바성당 말고는 성당, 박물관, 시청사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연짱이와 조용히 구시가 골목마다 이어진 돌길을 날이 밝자마자부터 해 질 녘까지 자박 자박, 걸어다녔을 뿐이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성당이나 박물관에서 받은 감동은 시시때때로 뭉클하게 회상되고 떠오르는 기쁨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였던 것은 또 그것대로 평온함과 안정감을 주었다. 


넵튠 분수(NEPTUNE'S FOUNTAIN). 

드우기광장(DŁUGI TARG SQUARE) 아르투스 코트(ARTUS COURT) 바로 앞에 있다. 그단스크 시는 그단스크를 대표하는 기념물을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아브라함 반 덴 블록(ABRAHAM VAN DEN BLOCKE)에게 해당 프로젝트를 의뢰하였다. 아브라함 반 덴 블록은 넵튠 동상 외에 아르투스 코트, 골든 하우스(GOLDEN HOUSE), 로얄 그라너리(THE ROYAL GRANARY) 등 그단스크의 다른 건축물 역시 세웠다. 넵튠 동상은 피터 후센(PETER HUSEN)이 만들었고, 게르트 베닝(GERDT BENNING)에 의해 1615년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넵튠 동상은 1633년 분수로 개조되었으며, 분수까지 물을 끌어오는 시스템이 현대화되는 19세기 후반까지 일년 중 며칠만 작동시킬 수 있었다. 처음 동상이 제작되고나서 분수로 개조되기까지 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그 사이 폴란드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아브라함 반 덴 블록이 사망한데다 분수 시스템이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대를 감안해 볼 때 분수를 제작하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매우 참신했던 것 아닌가 싶다. 1634년 넵튠 분수 울타리에 금박을 입힌 폴란드 국장(폴란드 독수리)이 추가되었으나, 1930년대 나치는 그단스크의 폴란드 역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분수 울타리에서 폴란드 국장을 떼어냈다.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분수는 폴란드 주요 도시들의 다른 유물들처럼 해체되어 그단스크의 다른 많은 유물들과 함께 숨겨졌다가 1954년에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고, 분수 울타리에 있던 폴란드 국장 역시 복원되었다. 그 후 거의 60년 동안 녹과 비둘기 배설물 속에 방치되었다가 2011년에서 2012년 사이 완전히 복원되었다.  


"사진 각도 무엇? 너는 사진 찍기 싫으면 꼭 이렇게 찍어 놓더라." 


사진 각도도 각도지만 겨울해는 짧아서 오래도록 건물 그늘을 드리우는 터라 사진이 이런 거라고, 연짱이가 변명한다. 그렇구나, 수긍하기에는 사진 찍기 싫을 때 온갖 사진 퀄리티가 전부 이 모양이라서. 건물 그늘 때문에 금박 입힌 폴란드 국장이 안 보이는 게 슬프다. 


추리아 레기스 아르투스(CURIA REGIS ARTUS).

아르투스 코트(THE COURT OF KING ARTUS). 각도 삐뚤. 

전성기는 16세기와 17세기였지만 1348년에서 1350년 사이 지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영국에서 시작하여 다른 유럽 국가에서 기사와 귀족이 만나던 집에 전설 속 원탁의 영웅 아서왕(KING ARTHUR)의 이름이 붙여졌고, 이곳 그단스크에서는 부유한 상인과 귀족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장인, 노점상, 고용노동자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이곳을 찾은 저명한 손님 중에는 영국의 헨리 4세도 있었다. 부유한 상인들과 외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저녁이면 이곳에 모였으며, 입장료는 17세기의 경우 3실링이었다. 저녁에는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고, 평소에는 음료수와 간단한 안주만 제공되었지만, 가끔은 이틀 동안 계속되는 큰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공식적으로 금지된 도박, 주사위, 카드 게임 및 다양한 내기가 매우 인기 있었다고. 사교 모임만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7세기에는 그단스크에서 인쇄된 책을 제공하는 사서들이나 화가들도 이곳을 찾았다. 다른 상인에 대한 금지령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건물은 1476년 전소되었다가 몇 년 후 재건되었으며, 1617년 아브라함 반 덴 블록에 의해 다시 한 번 재건되었다. 고대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테미스토클레스, 마르쿠스 카밀루스, 유다 마케베우스의 동상과 박공 위 천칭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포르투나의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1841년 화재 이후 내부가 고딕 양식으로 바뀌었다고. 홀에 들어서면 유럽에서 가장 키 큰 난로로 알려진 높이 10.64m의 거대한 르네상스 타일 스토브를 볼 수 있다. 그단스크 대부분의 건물이나 유적이 그러하듯, 아르투스 코트 역시 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945년 이후 공들여 복원되었고, 1967년 2월 25일 기념물 등록부에 등록되었다. 내부는 현재 박물관이다. 

 

드보르 아르투사(DWOR ARTUSA)

아르투스 코트(ARTUS COURT).


"여기 '아르투스 코트'인데 . . . 폴란드 어로 'COURT'가 'DWOR'인 모양이네." 

"'COURT'면 테니스 코트할 때 그 코트는 아닐테고 법원이야?" 

"'COURT'가 법원이나 법정이라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니야. 네가 말한대로 테니스, 배드민턴 같은 거 하는 곳도 코트고, 엄마가 되고 싶은 여왕님이나 공주님이 사는 궁전도 코트고, 또 . . . "  

"그럼 여기 궁전이야? 왕님이 살았던 그런 궁궐? 궁전이 다른 건물하고 딱 붙어 있어도 돼? 규모도 작아 보이는데." 

"끝까지 들어봐라, 어린이. 저택을 코트라고 하기도 해. 건물 내부 탁 트인 공간을 코트라고 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건물이름에 붙기도 하고."  

"아, '스타일스 저택'할 때 저택?" 

"'스타일스 저택 미스테리'를 원서로는 안 읽어봐서 제목만 보고는 스타일스를 뭐라고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한 번 찾아볼게. 그러게 영어 단어 외울 때 맨 첫 번째 뜻만 외우지 말라고 했잖아." 

"쳇,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를 듣다니. 코트하면 테니스 코트하고 법원만 쓰이지, 우리나라에서 코트가 저택으로 쓰이는 용례가 흔해?" 

"오냐아. 그리고 이 건물 그단스크에서 되게 유명한 건물이야. 안에 들어가봐야 확실히 알 것 같은데."  

"안 들어가고 싶어. 안 들어갈거야. 안 들어갈거지, 엄마?"  


그래서 들어가지 않았다. '코트'가 무슨 '코트'인지 그래서 지금도 모른다. 눈으로 확인 안 해봐서. 음 . . . 폴란드 어 'DWOR'에서 유추해보면, 그냥 '아르투스 회관' 쯤으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일종의 유료 모임장소 역할을 하였던 17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를 생각해봐도 그렇고. 그러니까 돈을 내고 -- 커피 한 잔 값 1페니 -- 입장할 수 있었던 점이나 부유한 상인과 지식인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소였다는 것에서 아르투스 코트와 커피하우스는 유사하다. 아르투스 코트와는 달리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토론 장소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였고, 계층에 따라 선호하고 즐겨찾는 커피하우스가 따로 있었다는 점에서는 좀 다르긴 하지만. 그러고보면 17세기나 21세기나 각자 다른 나라 혹은 다른 대륙을 대동단결시키는 트렌드(유행)가 존재하였고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참 흥미롭다. 


관광객들로 붐비기 전의 화창한 구시가 강변산책로를 걷는 것은 참 멋진 경험이었다. 날이 맑고 화창하니 강변도시가 갖는 강점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고색창연한 역사 도시 특유의 어쩔 수 없는 칙칙함은 유서 깊은 도시만이 전할 수 있는 묵직한 정서로 재해석되었다. 내 눈에야 늘 어린이지만, 벌써 훌쩍 커서 대학생이 되어 저만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연짱이와 오랜 세월을 담은 유럽의 돌길을 걷는다는 건 말 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당 떨어졌다고 달달한 것 좀 먹여가며 부려먹으라고 투덜대는 연짱이를 달래며 주위를 보니, 어느 새 도개교를 넘어 대관람차가 보이는 유원지까지 걸었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와플을 '고프리(GOFRY)' 라고 부른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으니 연짱이가 배고플만도 하지, 싶어서 크림 바른 와플과 사과잼 바른 와플을 사주었다. 하지만 연짱이는 든든하게 아침밥을 먹고 왔더라도 와플은 와플대로 또 먹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도 사과잼 바른 와플의 절반은 엄마에게 양보하였다. 


"역시 유원지 가격 내고 먹어야 제 맛이야." 

"너는 다른 건 엄청 아끼고 구두쇠 노릇하면서 이런 건 또 안 그러더라." 

"엄마는 정말 아무 것도 몰라.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게 비싸면 안 사먹었을거라고." 

"그래도 엄마한테 반 쪽 양보해주었네요. 착한 아이." 

"혼자 먹으면 작은 꾸꾸이 돼." 


혼자 자라는 아이들에게 흔한 '나누지 않고, 양보 안하고, 저 혼자 독차지하기'를 예방하고자 연짱이 애기 때부터 혼자 먹으면 작은 꾸꾸이(꿀꿀이) 돼, 세뇌를 시켜놓은 결과이다. 세뇌의 아주 좋은 예. 

 

아직은 이른 시간이어서 파라솔도 채 펼쳐놓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는 영업준비가 채 덜 된 터라 사진 왼쪽 귀퉁이의 사람들도 없는 완전히 텅빈 가게였는데, 연짱이가 주문을 하고 나니 저 사람들이 우르르 와서 주문을 하였고, 나와 연짱이가 서서 와플을 먹고 있으니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의자와 테이블이 말도 못하게 더럽 . . . 나는 옆집에서 커피를 주문해와서 마셨기 때문에 이곳에서 약 20분 정도 서 있었는데, 연짱이와 내가 다 먹고 나갈 즈음에는 사진 속 공간이 꽉 차 있었다. 천천히 유원지 쪽 강변을 구경하면서 멀리서 이 가게를 봤을 때는 그 많던 사람들이 그 새 썰물 빠지듯 다 빠지고 엄청 한산해져 있었다. 사람을 끄는 아이라 신기하게도 연짱이가 입장하면 한산하던 매장이 금세 붐빈다. 우리 연짱이 정말 럭키 걸. 


평화로워 보이는 모트와바 강. 이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단스크에서, 아니 내가 아는 목조건물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주라브(ZURAW)도 보이고. 


사진만 보면 봄 같다. 유람선도 있고 요트도 많이 정박해있었다. 이 배들도 그런 용도인지 모르겠는데, 요트 같은 경우는 시간당 가격을 내고 모트와바 강을 유람시켜준다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슬쩍 본 내부는 작은 바처럼 꾸며놓은 주방이 있어서 가벼운 스낵이나 와인 정도는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는 형태였다. 아무래도 겨울 비수기라서 주 중에는 모르겠고 주말에는 요트에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호객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염개미는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여서 해당사항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지만, 전화번호 적어놨다가 주 중에라도 이용하고 싶다고 연락하면 되지 않을까. 


구시가 모트와바 강 너머 쪽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어서 한 번 넘어가 보기로 하였다. 아마도 그 쪽이 신시가이겠지, 라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는데, 'LOWER CITY' 였다. 브라마 지엘로나가 있는 구시가와 겨우 다리 하나 차이라서 이곳도 구시가라고 봐야 하나 보다.  


맞은 편 길에서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성 바바라 성당(CHURCH OF ST BARBARA)'이라고. 폴란드가 사랑하고 자랑하는 요한 바울 2세 교황님 사진이 걸려있다. 역시 제 2차 세계대전 때 거의 다 파괴되어서 가장 최근 복원한 연도가 1956년인가 그렇다. 외부에서는 실루엣만 보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정말이지 시선강탈이었다. 그저 지나가면서 봐도 매우 멋있는 성당이어서 내가 들어가고 싶어 머뭇거리니, 연짱이가 성당이나 박물관 관람은 이제 그만하자고. 그단스크에서는 올리바성당과 소폿, 그디니아 근교 나들이 이후 거의 구시가 거리를 걸어다니기만 하였을 뿐, 성당도 박물관도 관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유명한 '왕실예배당' 조차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이 때의 나와 연짱이는 계속 되는 긴장과 지나치게 바쁜 여행자 모드에 꽤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구시가 브라마 지엘로나 근처 또 다른 바쉬타(BASZTA). 


폴란드 여행 마지막 도시에서 마지막 엽서를 부치기 위해 24시간 영업하는 구시가 우체국으로 향하였다. 


"엄마, 도나 아줌마랑 베니아 아줌마께 쓴 엽서 부칠거지?" 

"응. 생각해보니 우리 자신에게는 한 번도 엽서를 보내본 적이 없잖아. 그래서 엄마는 엄마 자신에게도 한 장 썼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낼 엽서 쓰면서 나 자신에게 보내는 엽서도 한 장씩 쓸 걸. 왜 지금껏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몰라." 

"어? 엄마는 벌써 썼어? 나도 내 자신에게 엽서 쓰고 싶은데 미리 안 써놔서 없어."

"이곳이 왜 우체국이겠어. 엽서도 많고 쓰자마자 바로 부칠 수 있으니까 우체국이지. 여기서 바로 써, 그럼."  

"펜도 열악한데 여기서?" 

"뭐 어때. 엄청 낭만적이구만."  


연짱이가 우체국 한 켠에서 매우 공들여 엽서를 쓰는 동안 나는 우체국 내부를 구경하였다. 그런데. 


기념우표로 묶음 판매하는 우표들을 구경하다보니, 어, 북한우표들이 엄청 많았다. 처음에는 한글이 보이길래 우리나라 우표도 많구먼, 하며 그냥 지나쳤는데, 가만, 우리는 공식적으로 우리를 '조선' 이라고 지칭하지 않잖아, 하고 다시 보니 북한우표가 맞았다. 와, 폴란드가 공산국가이긴 했구나. 북한우표는 내 생각보다 우표 퀄리티도 높고 유치하거나 조잡하지도 않았다.


'조선'을 '대한민국' 으로 바꿔도 모를 정도로 퀄리티 높고 예쁜 우표들이었다. 


이 우표들을 우체국에 팔았거나 기증하였을 폴란드 사람은 어떤 사연으로 1990년대, 1980년대, 1970년대 혹은 더 앞선 날들의 우표를 고이 붙인 편지나 엽서, 또는 우편물들을 북한사람과 주고 받았을까. 이 예쁜 우표들을 보면서 같은 민족이라고 말만 할 뿐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였다. 


주말이 되니 드우기 거리는 물론 중앙역 지하도에도 버스커들이 넘쳐났다. 


연짱이와 나의 그단스크 버스커 원 픽. 


기교면에서 더 훌륭할지도 모르는 젊은 버스커들은 채울 수 없는 연륜이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주말의 드우기 광장에 나분히 내려앉고 있었다. 막 땅거미 내려앉기 시작한 그단스크 구시가에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그의 'WONDERFUL TONIGHT' 은 나와 연짱이를 그 자리에 붙박히게 하기 충분하였다. 내일이면 귀국이라는 마지막의 정서와 어두워지면서 하나 둘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한 호박빛 구시가와 어우러진 초로의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나는 몹시도 울적하였다. 영원히 아니 한동안만이라도 초침, 분침 필요 없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지내고 싶었다. 


제 삶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기타든 피아노든 연주를 하기에는 꽤 쌀쌀한 날씨였다. 얼고 지친 손을 전기 히터에 녹이는 기타리스트의 모자에 50 즈워티를 넣어드리고 인사를 하니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묻는다. 자신은 프로 기타리스트라고. 프로 기타리스트의 얼굴에서 피곤한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나는 스스로의 재주 혹은 재능에 대한 자부심은 자주 피곤함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주제 모르는 오만함이 아닌 제대로 된 재능이 있는, 피곤함을 동반하지 않은 자부심을 가진 '자유로운' 아티스트는 슬프게도 세상에 그리 많지 않더라. 나이 든 프로 연주자의 피곤한 얼굴 위에 어쩐지 시들어가는 내 얼굴이 오버랩되는 것 같아 매우 서글펐다. 내년에도 저 아저씨의 연주를 이 자리에서 듣고 싶어, 라고 나의 연짱이가 말하였다. 


숙소 레스토랑에서 나는 여행을 마감하는 생맥주를 마셨고, 연짱이는 무알콜 모히또와 피나콜라다를 주문하였는데, 결국 피나콜라다는 내가 다 마셨다. 


"엄마, 피나콜라다에 코코넛우유하고 파인애플 조각이 함께 들어간다는 말을 왜 안 했어. 코코넛우유도 싫지만 코코넛 향하고 파인애플 향이 동시에 나는 음료는 정말 싫은데." 

"뭐야, 너 코코넛 싫어했어?" 

"엄마는 정말 딸 취향을 몰라. 나 등갈비 김치찜 좋아하는 것, 김치콩나물국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베니아 아줌마도 아는 걸 엄마는 모른다고. 그리고 나는 통조림 파인애플도 싫어해. 엄마는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모를거잖아." 

"집에서도 혼나고 여행 와서까지 혼나는구나, 엄마는. 딸내미한테 맨날 혼나네요."  


스무 해를 키웠으면서 코코넛 향과 파인애플 향의 조합을 아주 질색하는 딸내미 취향 하나 제대로 모르는 엄마를 용서해라, 연짱이. 여행 마지막 날, 여행 마지막 도시,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에 언제나와 같은 내 집에서의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여행 끝물을 서글퍼하며 퍼질러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까지 모두 올라갔으니 텅 빈 스크린에 대한 미련은 접고 관객은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특별할 것 없어 고마운, 우리가 외유하는 사이 조근조근 먼지 내려앉아있을 일상과 낯익은 아침이 기다리는 우리집으로 돌아갈 준비 완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원더풀 투나잇,' 원더풀 그단스크, 그리고 원더풀 저니(JOURNEY). 너무도 진부한 클리셰(CLICHE)여서 낯부끄럽지만, 이래서 'LIFE GOES ON'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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