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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1), 유럽연대자유노조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27

밤새 웅웅대는 바람 소리가 잠잠할 줄 모르더니 작은 미세 빗방울 흩뿌리는 몹시 흐린 아침이었다. 익숙해지려는 낯선 나라에서 곧 무거운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내 마음 같았다.


"엄마, 그단스크에서는 성당이나 시청사 같은 데 더는 가지 말자. 발트해변 다녔던 것처럼 탁 트인 데나 강변 돌아보고, 구시가 산책하고, 그렇게 마무리하고 집에 가면 좋겠어."

"그단스크도 공원이나 숲 좋은 데 꽤 있는데 지금 겨울이잖아, 어린이. 곰 나와 진짜. 음 . . . 성당, 시청사 가지 말자는 말이지. 전쟁이나 전투와 관련된 곳도 가지 말자, 그럼."


그래서 1안, 2안, 3안, 4안 겹겹이 짜온 계획서 중 선택된 곳이 유럽연대자유노조센터(EUROPEAN SOLIDARITY CENTER). 


폴란드 연대자유노조를 이끌었던 레흐 바웽사는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던 지도자였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먼먼 나라 폴란드의 노동운동 지도자의 이름이 뉴스에서 불리웠던 것을 나는 아주 또렷이 기억한다. 폴란드 연대자유노조가 당시 친소 정부에 의해 강한 탄압을 받으며 긴 지하활동을 이어가던 때는 우리나라 역시 노동운동사에서 암울한 시기여서, 가해진 탄압의 강도가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공산국가였지만, 이를테면 같은 의지를 가지고 압제에 저항하여 결국 노동자 출신 대통령이 세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우리나라 노동운동가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EUROPEAN SOLIDARITY CENTER(유럽연대자유노조센터).

2014년 8월 31일 오픈하였다. 그단스크를 필두로 한 폴란드 전체와 중부유럽, 동유럽의 노동운동사를 볼 수 있는 곳인데, 1980년 8월 파업부터 1989년 전환기까지 폴란드와 주변국의 민주주의적 변화를 다룬다. 대부분 내가 한창 중, 고딩 때 일어났던 일이어서 당시에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사도 아닌 폴란드 및 동유럽 노동운동의 내용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아무래도 동시대에 일어났던 일인지라 이해는 쉬웠다. 


그단스크는 항구도시여서 1980년 레닌 조선소에서 그 유명한 레흐 바웽사가 파업을 주도하면서, 연대자유노조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연대자유노조 결성에 불안을 느낀 폴란드 공산정권은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연대자유노조는 불법조직으로 탄압받았는데, 그 배후는 역시나 소련. 친소 공산정권 아래 노동운동 인사들 전부 체포 혹은 구금. 소련은 러시아 시절부터 폴란드를 그렇게나 괴롭게 하더니,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함께 그만큼 망가뜨렸던 것으로도 모자랐을까. 제 나라나 잘 돌볼 일이지. 폴란드 친소 공산정권은 1983년 바웽사가 노벨평화상 받은 것도 인정 안 하고 비판하고 트집 잡고. 1988년 파업과 노동쟁의, 1989년 결국 공산정권은 연대자유노조와의 협상을 받아들이고 의회 자유선거에서 연대자유노조 압승. 1990년 레흐 바웽사 초대 대통령 선출되었고 현재 대통령제가 섞인 의회내각제. 그래서 지금 이 나라는 사회주의국가인거야, 아니면 자본주의국가인거야?


유럽연대자유노조센터는 조선소 노동자 기념비 근처 조선소 출입문 옆에 위치한 연대노조 광장에 세워졌다. 녹슨 강철 소재 건물 외면은 조선소 풍경을 떠올리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데, 안그래도 염개미와 연짱이는 트램에서 내려 처음 건물 외면을 보았을 때 당황하였었다.


"엄마, 저 벽돌색 건물 외벽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녹슨 걸로 밖에는 안 보이는데. 폴란드와 중, 동유럽 노동운동사를 보여주려고 만든 센터라면서. 노동환경이 열악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저렇게 만든건가?"  

"센터 홈페이지 설명을 보면 이 건물 자리가 그단스크 조선소였다고 해. 초창기 조선소에서는 지금 보이는 것처럼 선박 만들 때 쓰이는 녹슨 강철판을 흔하게 볼 수 있었대. 그러니까 조선소 풍경을 떠올리게 하려고 일부러 녹슨 강철소재로 외벽을 만들었나본데. 다른 곳은 녹슬지 않도록 처리된 소재로 만들었대."


또한 넓고 탁 트인 공간이며 높고 비스듬한 강철벽 및 콘크리트 구조는 건설 중인 선박의 내부와 유사하다고. 이후 개인 투자자에게 매각된 그단스크 조선소는 결국 철거되었으니, 조선소의 역사를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 세워진 유럽연대자유노조센터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조선소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유일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구나, 폴란드 뿐 아니라 중부유럽과 동유럽 노동운동의 본산이었던 그단스크 조선소는. 


조선소 노동자 헌정 기념비(THE MONUMENT TO THE FALLEN SHIPYARD WORKERS 1970).

1970년 공산정권에 항거하는 거리 폭동으로 45명이 사망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980년 세워졌다. 1980년 자유노조연대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에는 임금인상 및 자유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와 함께 기념비 건립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42미터, 139톤의 강철 기념비는 1970년 폭동의 첫 희생자 세 명이 사망한 자리에 서 있다. 세 개의 십자가는 세 명의 희생자를 상징하며, 십자가 자체는 모든 시위대의 고통과 희생을 의미한다고. 십자가 위쪽에는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 사람들의 직업을 나타내는 닻이 있고, 아래쪽에는 고군분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새겨져있다. 레흐 바웽사는 기념비를 '고래의 몸을 관통하는 작살'이라고 말하였다. '고래는 아무리 애써도 결코 작살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산 같은 고래 앞 바늘처럼 작아 보이는 작살 하나가 커다란 고래를 꿰뚫어 쓰러뜨리듯,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지펴진 낱낱의 저항의지가 모이고 모여 큰 해일이 되어 결국 서슬 퍼런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기념비에는 체스와프 미워쉬(CZESŁAW MIŁOSZ )가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당신이 소박한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비웃으며 그를 조롱하고 그를 죽인대도, 다른 누군가는 태어날 것이고, 당신의 행동과 말은 기록될 것이다.' 아무리 기차소리 요란하고 시끄러워도,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고, 건강한 잠을 자고, 옥수수밭 옥수수처럼 잘도 큰다. 인간만큼 무력이나 권력, 금권에 연약한 존재도 없지만, 인간만큼 끈질기고 치열하게 정의를 고집하고 관철시키는 존재도 없다. 자유와 권리를 찾는 인간의 세대를 잇고 시대를 넘는 자유의지는 섬뜩하게 벼린 칼날을 목전에 들이댄대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역사와 그보다 준엄한 세월이 심판해준다. 


기념비에 새겨진 조선소 노동자들.


"엄마, 기념비 안에 부조가 들어있는데?"

"공산정권에 저항하면서 희생된 노동자들을 기린 거래."  


꼭 사람이 죽어나가야 혹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권력체들이 소름끼친다. 목숨도 전 생애도 단 하나 뿐이라 소중한 건데. 매우 착잡하고 서글펐다.


전시물들을 둘러보았는데, 그 중 바웽사가 공산독재정권과 협상하는 영상을 보면서 그래도 협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기야 그런 협상이 가능하기까지 무력 탄압과 목숨을 건 저항이 수 십년 계속 되었겠지만, 전국적인 파업과 죽음을 불사한 시위, 그에 동조하는 동유럽 다른 국가들을 직면하고는 시대의 요구이자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구나, 정권은 뜨끔했던 것이었겠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하늘은 동유럽 전체를 덮는 의지 굳건한 하늘이었을테니. 


이 분들을 보면서 나이하고 '꼰대'는 결코 정비례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였다. 전쟁 이전 지식계층이었고 전부 전쟁영웅들이신데, 그 삼엄한 공산독재정권 아래에서도 '노동자 방어위원회'(KOMITET OBRONY ROBOTNIKOW/KOR, 이를테면 연대자유노조 전신 쯤)를 지지하고, 노동운동가들을 보호하였으며, 편지든 성명서든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독재정권 아래서는 정권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 사실 누군가를 변절자라고 욕하는 건 그렇게 간단하고 이분법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함없고 일관되게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하나 뿐인 생을 걸었던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세상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크든 작든, 균형잡혔든 치우쳤든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살 수 있는 것이겠지. 정말 감사하게도. 


뭘 기다리고 있지? 지루함이지 . . .

무엇 때문에 줄 서 있지? 늙으려고 . . .

지루한 늙은이가 되면 뭘 얻는데? 권태 뿐 . . .

집에는 뭘 가져갈거지? 의심과 절망 조금 . . .

돌처럼 너의 터전을 지켜  

언젠가 그 돌은 다리가 되어

눈사태처럼 물밀어 들어올테니   

밤이 새도록

밤이 새도록

밤이 새도록


기다리는 자들의 송가 (어네스트 브릴)


지루하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보다 시커먼 절망속에서 늙어 죽는 것만이 희망인 것 같았던 사람들은 결국 막을 수 없는 눈사태처럼 물밀어 들어온 신새벽과 여명을 만났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누군가에게 자유의지는 허망한 절대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쓰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 깃든 자유의지는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고 구속에서 자유롭기 위해 발휘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만큼 위대하다. 


암울한 시절일수록 풍자가 흔해진다.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된 초기에는 그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창작력이 숭고하고 진지한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가들은 풍자로 돌아섰다.그렇겠지. 문학과 예술이 사회정치적 이념을 담아내기 바쁘면 프로문학, 예술처럼 문학과 예술의 가치와 효용성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동떨어진 무조건적인 순수예술은 그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실 의미가 없으니. 우리나라는 그런 풍자마저 허용되지 못하여 검열당하고 삭제되고 끌려가고 매장되고. 풍자가 자유로워진 게 사실 몇 년이나 되었나. 


안타깝게도 염개미나 연짱이는 유머코드가 좀 독특한 편이어서,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농담이나 개그를 보고 들었을 때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코미디나 개그를 보고 따라 웃으려면 해당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가능한데, 우리나라에서도 독특한 유머코드를 가진 염개미나 연짱이가 더구나 낯선 외국의 순도 높은 풍자를 쉽게 이해할 리가. 


"엄마, 이 풍자만화들 하나도 이해 못하겠어."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해, 어린이. 풍자라는 게 현 세태를 꼬집는 건데, 너는 한창 노동운동을 하던 시기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다, 우리나라 시사, 풍자만화도 어려울 판에 더구나 폴란드 풍자만화잖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음, 맨 아래 오른쪽 두 컷은 엄마도 알 것 같다. 폴란드 연대자유노조가 한창 저항운동을 할 때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 독재자였던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WITOLD JARUZELSKI) 장군을 까마귀로 그렸대. 폴란드 국장에 독수리가 들어가는 거 어린이도 알지? 독수리 대신 그래서 까마귀인거 같은데. 국격이 독수리에서 까마귀로 급락하는 순간이구나. 야루젤스키 장군은 크고 검은 선글라스를 주둥이 위에 걸친 까마귀로 희화되었는데, 선글라스 덕분에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앞 못 보는 독재자, 그리고 똑같이 앞 못 보는 그 추종자들의 목적지가 결국 절벽 말고 어디겠나, 그런 거. 나라꼴이 골로 가는구나, 하는 조롱 쯤 되겠네."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폴란드 공산정권 마지막 대통령이었으며, 바웽사의 최대 정적이었고, 공산당 제 1서기로 있던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대자유노조를 탄압하면서 바웽사와 레흐 카진스키를 포함한 수 만명의 노동운동인사들을 구속하였다. 그가 선포한 계엄령 기간 중 약 백 명이 희생되었다고. 계엄령 아래 불법단체가 된 연대자유노조는 지하활동을 계속 하였고, 야루젤스키는 공산주의가 몰락 수순을 밟던 1989년, 연대자유노조를 합법화시키며 협상에 나서, 같은 해 7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동유럽 전체에 퍼진 민주화혁명의 물결에 1990년 9월 마침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12월 치러진 폴란드 역사상 첫 민선 대통령 선거에서 바웽사가 압승을 거두었다.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에 대하여, 소련이 폴란드에 무력 개입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였고, 개혁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한다고 밝힌 바 있지만,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비밀문서에서는 조금 다른 정황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계엄령 선포와 연대자유노조 탄압 혐의로 2006년 기소되었으나 지병으로 재판은 중단되었으며, 향년 90세로 별세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에 바웽사는 "수많은 싸움에서 그에게 졌지만 자유로운 폴란드를 위한 싸움에서는 이겼다"고 회고하였다. 


야루젤스키의 생전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평소에는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 심지어 투병 중이던 병상에서도 -- 늘 큰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아, 제 2차 세계대전 중 참가하였던 전투에서 시력에 손상을 입었다고. 어쨌든 풍자가들 입장에서는 캐릭터 잡기 꽤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폴란드 국민이 아니니 야루젤스키가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로 미움을 받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우리나라 포함 다른 나라의 독재자들을 떠올려 볼 때, 약간의 경중은 있을지 몰라도 대동소이하게 큰 미움을 받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YE OLDE DAYS"를 외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전 후 폴란드 통제권이 나치에서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 중 하나로 전락. 새로운 경제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재산과 토지의 국유화가 이루어졌다. 국영농장에서 집단농업이 강제적으로 실시되었으나 국민들의 살림은 나아진 바 없었다. 게다가 서방국가들의 대출 거부와 경제제재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어서 물가는 오를 대로 오르고, 생필품에 대한 배급과 대기가 생활화되었으며, 심지어 배급카드 마저 등장하였다고. 저 당시 폴란드 인구의 거의 1/4이 연대노조에 가입하였다고 하니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풍자만화를 보면서 크라쿠프 워킹 투어 가이드 오빠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자신이 어렸을 때, 매일 너무 배가 고파서 엄마와 할머니께 왜 나는 매일 배가 고프고, 왜 우리집에는 늘 먹을 것이 없느냐고 울었다고. 그러한 상황이었는데도, 제 나라 노동자를 지키는 게 당연한 고위당국자가 서방국가들과의 무역협상 테이블에 앉아 한다는 말이 "한 달 동안 한 명의 노동자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댓가로 우리한테 뭘 줄거요," 라니. 독재로 혹은 저들끼리 똘똘 뭉친 유착으로 제 배만 불리는 집단의 뇌구조는 영원한 연구대상이다. 크고 검은 선글라스를 주둥이 위에 걸친 까마귀로 표현되는 독재자가 군화 신고 총 메고 계시네. 머리에 쓴 게 독수리 문양 새겨진 왕관인 걸 보니 황제가 되고 싶으셨던 걸까. 무력으로 종신집권이라니 독재자들은 머리속에 전형적인 패턴이 내재되어있나 보다. 권력의 속성인걸까, 인간의 본성인걸까. 


나치정권에게서 겨우 벗어났나 싶었더니, 계엄령을 내려 폴란드 전역을 다시 강제수용소로 만든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풍자도 보인다. 


호모 조모(HOMO ZOMO)는 인류를 가리키는 학명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 빗댄 폴란드 민병대에 대한 풍자. 'ZOMO'는 공산정권 하의 엘리트 부대인데, 원래는 위험한 범죄자를 제압하거나, 대규모 행사의 치안을 담당하고, 자연재해 등의 위기 상황일 때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1956년 창설되었다. 하지만 폴란드 계엄령 하에서 이들은 시민과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등 악명을 떨치면서 원래의 기능이 변질되었다. 1989년 공산정권의 몰락 이후 해산되었지만, 오늘날 'ZOMO' 라는 용어는 경찰의 만행과 동의어로 통한다. 엘리트 부대라면서 뇌 용적이 거의 없다는 게 풍자의 포인트.

 

제대로 된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여러 덕목 중 하나는 반드시 유머감각이어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비난이 아닌 비판이나 유머를 이해 못하거나 받아주지 못하는 사람은 대체로 경직된 사람이기 쉽다. 경직된 만큼 여유를 갖기 어렵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이해도나 공감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정당한 비판조차 수용하지 못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치를 하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 제 3조. 전 세계 언어로 되어 있다. 나는 정치적인 이념색으로 개인에게 혹은 집단에게 인권을 가장한 희생을 강요하는 무리를 경멸하기 때문에, 이것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울컥, 하였다. 


"어린이, 노동운동은 인권운동과 최종적으로는 결이 같아. 너도 최저임금에 민감하잖아. 그리고 위험 없고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인격적인 모욕 따위 없이 아르바이트하고 싶고. 사람은 다 똑같아. 이 센터에서 말하고 싶

 은 것 중 하나는 그런 걸거야. 여기 세계인권선언 제 3조가 말하고 싶은 것도."

"응."


연짱이에게 이 곳은 너무 무거웠나 보다. 21세기를 사는 어린이를 채 못 벗은 청년에게 20세기 중반의 남의 나라 노동사는 무겁고 재미없고 지루하였을테지. 그렇더라도 21세기를 사는 아이가 우리 역시 다르지 않았던 역사 한 자락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20세기 엄마의 조금은 무거운 바람이었다고 이해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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