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우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미 Oct 18. 2018

아이가 세 번 울었다

달래고, 탓하고, 후회했다

꽤 오랫동안 다치거나 갑자기 우는 일이 없었던 서우.

그저께는 한 번 나갔다가 세 번이나 울고 말았다.

첫 번째. 같은 단지 다른 동 앞에 있는 놀이터에 러닝머신 같은 기구가 있다.

성인 키 높이만큼 손잡이를 둘러놓았고, 

바닥은 앞쪽으로 올라가는 경사가 졌는데, 가로로 놓인 금속 통 여러 개가 발을 밟으면 빙글빙글 돌아가게 되어 있다.

처음 발견하고 서우가 찾은 놀이 방법은 내가 상체를 붙들어주면 다리로 우다다다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는 평소와 다르게 바닥의 앞쪽으로 기어올라가는 걸 시도했다.

"서우야, 이건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일단 아빠가 잡아줄게."

오르려고 하면 미끄러져내려 뒤에서 계속 잡아주었는데 

한 순간 미끌 하더니 내가 잡아주던 높이보다 바닥이 가까워 얼굴이 금속 봉에 땅~ 부딪혔다.

울음이 터져 나오겠구나 직감하게 되는 아픈 장면...

정말 아픈 울음을 터뜨리며 서우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느 정도 달래고 얼굴을 살펴보니 윗입술이 부어 있다.

제대로 잡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거 봐 위험할 것 같다니까 하며 탓하는 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피가 나지 않는 것을 위안 삼으며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사이 

새 부리처럼 부풀어 오른 윗입술에 내 속이 쓰렸다.


우는 서우를 안고 달래며 다른 놀이터로 이동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는 되어야 놀 법한 기구물이 있었다.

그물을 올라가도록 도와주자 공중 통로에 올라 뿌듯한 얼굴로 서 있는 서우.

마침 서우보다 두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형들이 나타났다.

요즘 들어 부쩍 형이나 누나들 노는 것을 유심히 보고, 구경하는 자체를 즐기고 있어서인지

형들이 오는 것을 내심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통로에 서서 형들이 뛰어다니는 걸 구경하는데 한 명이 서우를 툭 치고 지나갔다.

예상치 못한 충돌에 어어 하더니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순간 서러움과 무서움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그물망이 있어 뒤로 넘어져도 괜찮긴 했지만 나도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서우를 안았다.

서우를 치고 간 아이는 서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놀이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그 놀이터에 있던 모든 아이와 어른들에게 서우의 울음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놀라고 서러웠을 서우를 토닥거리는 한편

눈으로 서우를 치고 간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에게 레이저를 쏘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놀기 바쁜 아이들과 한담을 나누는 엄마들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던졌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세상은 평화롭고 일상적이었다.

"밖에 ㅠㅜ"

우는 서우와 함께 이곳이 아닌 다른 바깥으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다니며 고양이를 찾던 길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향하던 중 서우가 미끄럼틀을 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이것만 타고 집에 가자?"

"응!"

큰 원통형 미끄럼틀이 앞뒤로 놓인 구조물이었다.

같이 올라갔다가 같이 내려오니 재미있어했다.

그러더니 거꾸로 올라가고 싶다는 것이다.

뒤에서 잡아주면 되겠지 싶어 엉금엉금 오르는 아들의 엉덩이를 

엉금엉금 오르며 밀어주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오르내리고 집에 가자고 했더니

"한 번만 더~" 

라고 한다.

"그래, 진짜 마지막이야. 이것만 타고 가자."

"응."

엉금엉금 오르는 아들의 엉덩이가 씰룩거린다.

귀엽다 참 귀여워~ 하며 거의 다 올라갔는데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미끌, 하고 미끄럼틀에 쿵- 머리를 부딪혔다.

울음이 터져 나온다.

하루에만 세 번째 우는 것을 듣자니 속이 아팠다.

아까 그냥 데리고 갈 걸 후회가 치솟았다.

오른쪽 눈썹 부분의 살이 땡땡 부어올랐다.

휴...


집에 와서 찬 물로 찜질을 해주니 가만히 대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찜질을 받는 아들이 부쩍 커 보였다.

커 보이는 아들과 달리 쪼그라드는 내 속도 보였다.

아들이 울면 거의 동시에 달래면서도 속으로 탓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더 챙기지 못한 나를 탓하는 동시에 

조심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해주었지만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한 아들을 탓한다. 

하나는 아빠는 이러해야 한다라고 배우고 알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는 인간의 솔직한 현재 실력, 위치가 드러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부끄러웠다. 

그리고 후회가 밀려왔다.

이렇게 했으면, 저렇게 했으면 안 다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집에 와서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웃고 밥을 먹는 서우를 보면서

후회는 일어난 일에 내가 나중에 붙인 이름이구나 싶었다.

나를 탓하고 서우를 탓하느라 아프고 서럽고 무서운 서우의 순간을 돌보아주지 못했는데

나중에 나나 서우를 탓하는 것도 후회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워

안 그럴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되어 유감이다, 아쉽다고 했구나 싶었다.

포장지가 무색하게 새부리가 된 윗입술은 서우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씰룩거렸고

혹처럼 난 눈썹 위 붓기는 서우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도드라졌다.

아내는 가볍게 잘 잡아주지 그랬어, 왜 그랬어하고 넘어가 주었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무서워서 못 물어봤다. ㅋㅋ..)

사실 바깥에서 보기에 내가 후회하는 모습이었는지도 자신이 없다.


아마도 이렇게 하루하루 아이와, 아내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지내고 있겠다 싶다.

기록하고 드러내는 것으로 미처 모르고 하는 일들, 남들은 다 보이는데 나만 모르는 것들을 보아가는데 보태려 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가 세 번 울 때, 

적어도 한 번은 아이의 울음을 보아주고

그다음은 두 번, 

언젠가는 세 번 모두 보아줄 수 있는 아빠가 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응!
매거진의 이전글 소소(笑小)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