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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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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Nov 05. 2018

짧은 기쁨과 오랜 아픔 사이에 깊은 망각이 흐른다

서우 코가 막혔다.

나를 닮아서인지 환절기에 코가 약해지는 것 같다.

지난주 후반부부터 조금씩 막히는 조짐이 보였는데 워낙 건강한 한 해를 보내고 있어서 방심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아주 고생하며 보낸 불면의 밤은 희미하고

유래 없이 무더웠던 올여름의 낮과 밤은 아이가 잠을 잘 때만 켰던 에어컨의 선선하고 쾌적한 기운이 선명하다.

그런 선명함은 우리 아들 건강하다는 이상한 자부심과 함께 남아있다.


조금씩 콧 속이 건조해지더니 코가 막혔다.

이윽고 맑은 콧물이 조금 흐르는가 싶더니 더 꽉 막혔다.

오늘은 끈끈한 콧물로 악화되었다.

코가 답답하니 짜증이 좀 많아졌는데 우는 아들의 코에서 코가 나오길래

잡아당겼더니 줄줄이 뽑혀 나와서 무척 시원했다.

울던 아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잠시 울음을 멈췄다가 다시 울었다.


그래도 낮에는 잘 놀았다.

입으로 후후 숨을 쉬며 할 일은 다 했다.

밥 먹을 때 오래 씹어야 하는 건 숨도 쉬고 밥도 먹느라

부드럽고 쉽게 목으로 넘어가는 반찬 위주로 먹게 되었지만

웃고 말하고 뛰어노는 건 괜찮았다.

콧물 방울이 생겨 부풀어 오르면 거울 앞으로 데려가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동안 코를 흥흥거리며 콧물 방울을 만들던 서우.


밤이 오고 서우가 잠이 들자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코로 숨을 들이쉬려 하면 꽉 막힌 비강에서 산소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다급해진 폐가 온몸을 쥐어짜기 시작하면

잠시 넋 놓고 있던 입이 급히 대타로 숨을 쉬었다.

컥, 커컥... 하아... 후~

서우의 코는 지치지 않고 숨을 쉬려 했고

입은 한결같이 자신의 본업은 먹고 마시는 것이라 주장하며 뒤미쳐 호흡하곤 했다.


입과 코가 실랑이하는 사이

산소가 필요한 온몸의 여러 곳이 아우성이었다.

코가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는 각도가 나오도록,

입으로 호흡하는 갑갑함을 달래도록,

서우는 끊임없이 온몸을 구르며 숨을 멈추고 또 쉬기를 반복했다.


옆에 누워 잠을 재우고 있자니

데구루루 구르는 기척과

바늘구멍 하나 꽂힐 자리 없는 듯한 콧 속과

숨을 쉴수록 말라가는 입 속과 목젖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몸이 고단하니 눈은 감기고 잠에 빠져들었는데

숨을 잘 쉬지를 못하니 누군가 멱살을 잡고 흔들어 잠을 깨우는 판국이었다.

서우가 숨을 쉬는 리듬에 나도 모르게 동조되어 호흡 곤란이 오는 듯했다.


간신히 호흡이 안정된 - 물론 입으로 쉬는 마른 숨- 것을 보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아내와 둘이 미스터 션샤인을 보았다.

2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다른 세상에 빠져들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오니 안방에서 서우가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다문 입에서 나오는 쉬익, 쎄액 소리,

코가 끊임없이 호흡을 시도하려 애쓰는 컥컥 소리,

코도, 입도 숨이 여의치 않아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다시 바꾸는 소리.


2시간 동안 드라마를 보며 즐거움을 누릴 때

아들은 숨을 쉬기 어려운 조건에서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숨 쉴 틈 없이 애를 써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안방에 들어가서 내 자리까지 굴러온 아들을 자기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코에 식염수를 스프레이로 뿌려주고, 비염고를 면봉에 묻혀 살짝 발라주었다.

아들은 코에 자극이 올 때마다 자세를 바꾸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누우니 재울 때보다 더더욱 생생하게 아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시금 그 리듬에 내 호흡이 맞춰져 갔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나도 모르게 몸을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이미 속으로 들어온 소리는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까무룩 잠들었고 아침이 왔다.


서우는 여느 때처럼 아빠를 부르며 나를 깨웠다.

입으로만 숨을 쉬어서 목이 살짝 잠기긴 했지만 다행히 목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이 어린것이, 그런 숨으로 긴긴밤을 보냈다니...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육아의 새 아침이 밝았구나 받아들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낮잠을 재울 때,

그리고 다시 밤잠을 재울 때,

내가 잠자리에 들 때,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은 잠시 점을 찍고

아들의 오랜 아픔과 육아와 드라마에서 느낀 짧은 기쁨 사이에 흐르는 깊은 망각의 강을

나는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잠시 찍은 점은 아빠라는 후광을 받아 훈장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서우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정확히 이만큼이구나 아는 것은 짧고 아팠으며, 잊는 것은 길고 달콤했다.

그것을 뒤미쳐 알게 되었다는 것이 부끄럽고,

이마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기록하고,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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