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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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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Apr 22. 2019

옥수수

서우를 재우다 잠든 아내를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

조금씩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부쩍 내복 바지를 안 입고 자려는 서우는

기저귀만 차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서우가 어딘가에 내팽개친 바지를 찾아 다리를 끼워 넣었다.

문득 손 끝에 스치는 아들의 발가락이 탱글탱글하면서 부들부들했다.

어? 이건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하다가 어둠 속에서 뿅~ 옥수수가 떠올랐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옥수수와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산으로, 냇가로 쏘다니며 놀던 내게 여름 땡볕은 무척 힘겨웠다.

하늘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땅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바싹 마른 흙에 뿌리를 내리고 가림막 없이 자라던 작은 옥수수가

보기만 해도 뜨거운 땅에서 없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개미, 거미처럼

보고만 있어도 진이 빠지는 듯했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원래 이 색이었나 싶은 파란 하늘에 끌려 위를 자주 보았는데 

어느새 나보다 키가 자란 옥수수와 꼬부라진 수염도 함께 보였다.


그랬다.

옥수수를 먹을 때는 하늘이 파랗고 쨍했다.

할머니 집 앞 텃밭에서 자라던 옥수수는 

나와 동생이 잠자리채와 채집통을 들고 뒷산 이곳저곳 곤충들을 잡으러 다니던 뜨거운 여름 볕 아래에서 

아, 이게 옥수수구나 알아차릴 만큼 조금씩, 분명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다 긴팔을 입고 하늘이 파랗고 쨍한 가을이 되면

불쑥 자란 옥수숫대와 잎으로 온 텃밭이 무성해지곤 했다.


할머니는 따갑고 시원한 햇살 아래에서 옥수수를 뜯어 한 솥을 쪄냈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동생이나 사촌동생들과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거나

작은 방에서 까무룩 낮잠을 자면서

옥수수를 기다렸다.


달큼하고 뜨끈한 김이 집 안에 퍼질 즈음이면 

나는 엄마에게 옥수수가 다 됐는지 재촉하듯 물어보곤 했다.

아직, 조금만 기다리면 돼.

그놈의 아직, 그놈의 조금만을 원망하다 짜증이 나려고 할 때

할머니가 소쿠리 가득 옥수수를 내오셨다.

밖에서 파는 옥수수처럼 노랗고 가지런한 모양은 아니었다.

갈색, 흰색, 노란색이 섞인 삼색 고양이 같은 옥수수는 생긴 것도 울퉁불퉁했다.

꼭지에 달린 잎은 처음 밭에서 딸 때 대강 잘라내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손으로 뜯어내야 했다.

처음에는 어찌나 뜨거운지 쉽게 잡지도 못했다.

빨리 먹고 싶은데 잎도 끊어내야 하고, 식을 때까지 왼손 오른손 번갈아 잡으며 식히는 게 어찌나 번거롭던지.

그렇지만 일단 두 손에 안정적으로 들어오면 옥수수만큼 즐거움을 주는 것도 없었다.


나는 먼저 양 끝을 잡아 똑하고 두 동강을 냈다.

그리고 뾰족한 쪽이 있는 반절이 아닌 다른 쪽을 먼저 먹었다. 

뽀족한 쪽은 알이 없는 부분이 많고 모양도 어딘가 아쉬워서 나중으로 미루곤 했다.

단면의 첫 줄에 달린 옥수수알을 먼저 이로 하나씩 뽑아 먹었다.

그렇게 한 줄을 다 뽑아서 입 안에 넣으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후드득 입으로 훑어 우적우적 씹는 옥수수 알은 단단하고 뽀득뽀득했다.

두 볼이 미어지도록 알을 모으고 씹으면 묘한 쾌감이 있었다.

입 안 가득 빻아진 옥수수알을 삼키고 다시금 옥수수를 한 바퀴 훑어서 옥수숫대만 남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중간에 쯥쯥 옥수숫대를 빨면 짜릿하고 아린 즙이 나왔다.

그렇게 반 토막을 다 먹고 빈 소쿠리에 툭 던지고, 남은 반 토막을 다 먹고 소쿠리에 톡 던지고.

달콤한 것도 좋았지만 나는 탱탱하고 뽀득거리는 옥수수알의 식감이 좋았다.

내 이가, 내 잇몸이, 내 볼이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달까.


아들의 발가락은 실감이 났다.

스르륵 스쳤을 뿐인데 뽀득거리고 탱글탱글한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손가락을 움직여 발가락을 조물조물 만졌다.

아구아구 깨물고 싶은 옥수수알 같은 발가락이 움찔거렸다.

바지를 입히고 나오며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길쭉하고 삐뚤빼뚤하고 털이 송송 난 발가락이 보였다.

이건 옥수수가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호프집에 가면 기본 안주로 나오는 김 붙은 것 같은 울퉁불퉁한 스틱 과자?

고개를 흔들어 몹쓸 상상을 떨쳐내니

아들의 발가락을 다시 만져보고 싶었다.


손 끝에서 꼼지락거리는

탱글탱글 뽀득거리는 

투명하고 단단한 

열 개의 

옥수수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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