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봄이 오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미 Jun 23. 2016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아들로 살아보니

나는 몇 살부터 내가 남자라는 걸 인식했을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5-6살 즈음 남자아이다운 것, 여자아이다운 것에 대한 어른의 가르침과 내 행동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을 보고 스스로 배웠지 싶다.(더 일찍일수도? 전혀 기억나지 않으니까 뭐..) 그 전에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는 게 나의 삶에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졸리면 자고, 울고 싶을 때 울고, 신날 때 신나고, 배고플 때 배고프고, 똥이 마려우면 싸며 살았을 것이다. 꾸미거나 감추는 것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또 남녀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시작하던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갓난아이의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동생이 기어다니던 시절에 안고, 업고, 터질 것 같던 볼을 깨물던 장면이 생생하다. 그 장면들을 떠올릴 때면 깨끗하게 빤 흰 수건이 따뜻한 볕에 잘 말랐을 때 나는 은근하고 달큰한 냄새를 맡는다. 그 때의 내게 동생이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며 여자형제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중학교 때까지 엄마한테 여동생 만들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한 가지 이유는 동생이 점점 커가며 내가 일방적으로 보살피던 관계에서 같이 놀아야 하는 관계로 이어졌는데 나는 이 관계의 전환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많은 형제들이 그렇듯, 내가 또래 친구들과 놀 때면 엄마는 항상 동생을 데리고 가서 같이 놀라고 했다. 나는 나 놀기도 바쁜데 동생을 챙기는 게 귀찮고 싫었다. 동생 입장에서는 여섯 살 평생 가장 친한 친구인 줄 알았던 내가 자기를 귀찮게 여기니 오죽 섭섭했을까 싶다. 그러다 동생도 또래 친구가 생기고 자기의 영역을 만들어나가면서 우리 두 형제는 일상에서 만나는 일이 점점 줄었다. 

줄어드는 만큼 점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동생 말고 애지중지할 수 있는 새 동생을 바랐다. 그래서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이 있으면 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가 딸을 찾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세 남자와 함께 살던 엄마는 일상이 건조하고 심심해서 괴로워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붙잡고 대화를 시도했고, 우리는 잔소리로 들었다. 그렇게 서로 대화하는 법을 모르며 살았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주었는지 그간 살면서 품어왔던 속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때론 맞장구 치고 가끔 대안도 제시해주었다. 그러자 엄마는 다른 친척이나 아줌마들에게 우리 큰 아들이 딸 노릇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딸 노릇이 엄마에게는 대화였던 셈이다. 


엄마는 이미 나와 동생이 어릴 때부터 딸에 대한, 대체로 딸이 가질 법한 특성을 우리에게 기대했다. 학교 끝나고 돌아온 내게 엄마는 항상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셨고, 특별할 것 없던 나는 별 일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 엄마는 다른 집 애들은 집에 오면 종알종알 미주알고주알 얘기한다던데 너는 그렇게 할 말이 없냐며 아쉬워하셨다. 쭉 뻗은 동생의 다리를 보며 엄마는 동생이 여자로 태어났으면 미스코리아 감이라며 동생보고 다리를 쭉 붙이고 서 보라고 하고는 흐뭇하게 웃으셨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딸에 대한 동경이 속에서 커져갔다. 더불어 엄마의 외로움을 제대로 보아주지 못했던 아들인 나에게 실망했다. 나름대로 딸 노릇한다지만 아들이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여겼다. 어느 샌가 밖에서 아들 낳아봤자 소용 없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 나를 보았다. 그렇게 딸을 바라고 아내와 결혼하고 나서도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여전히 봄이가 딸이었으면 한다. 그런데 봄이가 아들이면 어떨까 들여다보니 그건 그것대로 뭉클한 것이 있다. 아들로 살아가며 아빠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다. 가정을 화목하게 해주지 못하는 무뚝뚝한 아빠의 스타일이 아쉬웠다. 그런데 아빠는 군대를 갈 때나, 스리랑카를 갈 때, 대학을 졸업했을 때, 결혼할 때, 아이를 가졌을 때 등 굵직한 일이 있을 때 큰 힘이 되었다. 한국 남자의 삶을 살아본 선배로서, 사회의 거친 파도를 넘어온 가장으로서 아빠는 가끔 세게 안아주고, 격려해주고, 한 통 전화에 반가워하고,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고, 걱정 말라며 조용히 응원해주었다. 그건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두텁고 단단한 것이었다. 엄마의 눈물이 속을 저미는 거라면 아빠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가슴이 패이는 아픔이었다. 


그래서 봄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다 좋다. 아들이라면 아들로서 살아온 내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의 아빠, 봄이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다. 함께 목욕탕에 가서 등을 밀고, 지리산 종주도 하고, 축구나 수영 같은 운동도 함께 하고 싶다. 딸이라면 나는 세상에 없는 딸바보가 될 것이다.(사실... 아들과 달리 딸이 태어난 뒤의 일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여자는 어떻게 커가는거지..?)  아들이든, 딸이든 아빠의 삶이란 것은 변함없다. 모두 다 첫 경험이다. 모쪼록 몸 건강히 12월까지 엄마 뱃속에서 잘 지내다 세상에 나오면 된다. 아들로서 살아온 내가 아들의 아빠가 될 수도, 딸의 아빠가 될 수도 있다니... 둘 다 좋다. 너무 좋다 ^^

매거진의 이전글 봄이 여기 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