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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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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Jun 30. 2016

아주 작은 변화

잔잔하게 퍼지는 기쁨

아내의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겉으로 봐서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매일 보는 내게는 보인다. 밥을 많이 먹어서 나온 배가 불룩하고 말랑한 찹쌀떡 같다면, 지금 배는 팽팽하고 속이 꽉 찬 물풍선 같다. 슬슬 배를 쓸어보면 말캉하게 눌리는 대신 묵직한 양감이 손끝에 전해져 힘을 줘서 누르면 안 된다는 감이 팍팍 온다. 보이지 않던 봄이가 이제 시야에 들어온다. 아내의 배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린다. 이 묵직한 뱃속에 봄이가 있구나. 지금은 머리를 어느 쪽에 두고 있을까. 다리는 꼬아서 양반다리를 했을까, 쭉 펴고 있을까. 두 손은 탯줄을 잡고 있을까, 손가락을 빨고 있을까. 


가만히 배에 손을 올려놓고 혹시 모를 태동을 기다린다. 아내는 며칠 전에 톡톡 배 안쪽에서 두드리는 느낌이 있었다고 했다. 아내가 너무 부러웠다. 나도 느끼고 싶다. 이럴 때 보면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아빠가 알 수 없고 겪어볼 수 없는 분명한 격차가 있다. 피와 살로 이어진 두 사람의 유대가 부럽고 질투도 난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한 몸에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또 기적 같다. 이 기적을 소중히 지키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이런 게 아빠의 본능인가 싶다. 


아내의 배가 나온 것처럼 내게도 아주 작은 변화가 있다. 하나는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서기 전 아내의 다리를 주물러준다. 회사 선배들에게 임신하면 자다가 종종 쥐가 난다는 말을 들었고 아내도 임신하고 나서 다리가 잘 붓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아침마다 하는 것으로 스스로 정하고 주무르고 있다. 물론 아주 피곤해서 출근 준비가 늦었거나, 회사에 좀 일찍 가야 하거나, 아내가 아주 곤하게 자고 있는 날은 그냥 나온다. 일주일에 3~4일은 주물러주고 나오는 것 같다. 다리를 주무르면 아내는 자다가 깨서 실눈을 뜨고 조금 뒤척이다가 아이고 시원하다, 아야야 아프다 한다. 그렇게 찹쌀떡 주무르듯 마사지를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다른 하나 역시 출근길에 하는 일인데 물통을 침실에 놓고 나가는 것이다. 생수를 주문해 먹는 우리는 보통 식탁에 물통을 놓는다.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물통을 침실에 놓으면 아내가 일어나서 그 물을 마신다. 이전에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 행동은 주말 아침에 아내가 가끔 물통을 갖다 달라고 부탁한 것에서 시작됐다. 이불속에서 막 잠이 깼는데 목이 마를 때, 일어나서 물을 마시러 가기는 귀찮고 목은 마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다시 스르르 잠들었다가 목이 말라 다시 깼을 때의 심정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물통을 놓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주 들어 더 좋은 모습이 된 것은, 식탁에 있던 물통에 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 물통을 놓고 가는 게 아니라, 집 문 밖에 있는 새 물통을 꺼내서 침실에 놓고 간다. 새 물통의 뚜껑은 살짝 돌려놓아 열기 편하게 해둔다. 이런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변해간다. 


아주 작은 행동이 불러오는 기쁨은 잔잔하다. 잔잔하게 마음 깊은 곳으로 스미듯 퍼진다. 상대의 일상은 어떤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아내는 머리맡에 놓인 물통으로 목을 축인다. 자다 일어난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눈은 반쯤 감겨있다. 꿀꺽꿀꺽꿀꺽 세 모금 마시고 하아- 한숨 한 번 쉰다. 벽에 등을 기대어 앉고 안경을 찾아 쓰고 핸드폰을 들어 이런저런 것을 본다. 조금 있다 일어나 묵묵히 밥을 차리고 혼자 식탁에 앉는다. 밥을 먹고 빨래를 한다. 공부를 하고 친구와 수다를 떤다. 엄마와 통화하고 시어머니와 연락한다. 남편이 전화해 컨디션을 물어보고 오는 길에 과일을 사다 달라한다. 일상 사이사이를 채우는 생각과 감정을 헤아려본다. 뱃속에 아이를 가진 엄마의 하루를 짐작해본다. 엄마와 함께하는 봄이의 하루가 궁금하다.


궁금해하기 시작하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어떻게 되어갈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아내의 배는 아주 조금씩 변해왔다. 봄이가 큰 만큼 불러왔을 것이다. 앞으로 아내의 배는 매일 부풀고 묵직해질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발끝이 보이지 않고, 두 손으로 받치며 다니게 될 것이다. 봄이는 조금씩 커가며 아빠 목소리를 구분하고 엄마 배를 손으로 발로 두드릴 것이다. 그런 순간은 아주 작게, 조금씩 오고 갈 것이다. 그런 순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작고 조그만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정말 실감 난다. 그러니까 더 관심이 가고 더 소중하고 귀하다. 이런 게 사랑이구나 싶다. 아이를 가지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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