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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Jul 07. 2016

다들 이렇게 사는 거죠?

번외_직장인 아빠 이야기

한 주가 다르게, 그러니까 하루가 다르게 아내의 배가 땡땡해지고 있다. 배를 쭉 내민 것처럼 아랫배가 통통하다. 강의를 듣고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 나가면 배부터 눈에 들어온다. 이번 주부터인가 집에서 틈 나면 배를 쓰다듬고 있다. 한 손으로 슬슬 쓰다듬다가 양 손으로 번갈아가며 쓸어본다. 손으로 받쳐보기도 하고 배에 귀를 대기도 한다. 자기 전에 아내에게 선물로 준 시 모음집에서 하나씩 읽어주기 시작했다. 먼저 곯아떨어진 날도 있지만...


오늘은 아빠의 일 이야기를 할까 한다. 번외 편이다. 정확히는 내 이야기가 아닌 왕남의 이야기다. 


왕남은 우리 회사의 에이스다. 왕의 남자라서 왕남이다. 그는 얼마 전 사표를 냈고 휴가 중이다. (사표 수리는 아직이다. 수리되지 않으면 휴가 종료 후 무단결근 처리가 된다. ㄷㄷ) 휴가 중인 그에게 소고기를 사달라고 했다. 소고기라는 좋은 구실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제 과장님 한 분과 함께 셋이 만났다.


그의 사직을 둘러싸고 회사 내에서 말이 많았다. 왜 그랬을까. 남아있었다면 꽤 높은 자리까지 보장될 만한 실력과 인맥을 갖고 있는데. 누가 봐도 사장이 인정하는 사람인데. 이해가 잘 안 된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나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은행으로 간다던데, 업무 차 만나던 회사로 간다던데. 소문만 무성할 뿐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 그만둔 이유. 왕남은 사실 최근 몇 개월 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집에 들어가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혼자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렇게 두세 시간 동안 생각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무기력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이어졌다. 회사에서는 출근한 시간 내에 할 일 딱 마치고 칼퇴하고, 주어진 일은 척척 해내고, 평가 잘 받고, 별 걱정 없어 보이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어떠 일을 해오면 그에 대한 공과 과를 구분해서 칭찬하고 다독이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잘 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잘 되지 않은 기준은 순전히 오너의 기준- 포커스를 맞추고 이 정도밖에 안 되냐, 더 해와라 라는 피드백이 가장 힘들었다. 그 일을 8년 넘게 해왔다. 어떤 딜을 할 때 만나는 상대방 역시 월급쟁이다. 그 사람 역시 왕남과 협상한 뒤 자기 사장에게 돌아가 보고해야 한다. 어떠 것을 얻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주었는지. Give and Take라는 간단한 세상 물정이 오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직 Take. 8년 간 왕남은 상대와 협상하며 오너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반영해왔지만 오너의 기준에 충족되는 건 거의 없었다. 잘 해온 것에 대한 인정이 없고, 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적이 8년 간, 매일 이어졌다. 여러 번의 딜이 깨지고 무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업계 사람들에게 사기꾼이 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밖에 나와 먼저 자유롭게 된 사람들을 만났다. 불안이 싹 사라졌다. 길이 보였다. 이거였다. 문제를 정확히 봤다. 지금은 자유롭고 같이 일해보자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고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 정말 다행이었다. 나와서도 똑같았다면 어쩔 뻔했나 소름이 돋는다. 다만 아이가 아빠가 아침에 회사에 안 가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매일 집에서 나온다. 여의도에 있는 친한 형 사무실로 출근하며 일을 조금 돕다가 오후에 사람들을 만난다. 대책 없이 나온 것에 대해 아내에게 미안하고 눈치도 많이 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왕남은 편해 보였다. 이제 외부에서 회사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며 그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물었다. 

"인마, 넌 몇 년 더 해보고 IPO까지 해. 그렇게 하면 정말 도움 많이 될 거야."

몇 년이라니. 바뀌지 않는 윗선, 희망적이지 않은 회사 전망. 왕남의 말은 귀에 들리지만 속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왕남은 이걸 8년을 했다 이거지. 휴...

"다들 이렇게 사는 거죠?"

술김에 약간 격앙돼서, 제발 그렇다고 해주길 바라며 묻는 것도 아니고 선언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 나왔다.

왕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 부정, 혹은 둘 다 아닌 끄덕임으로 들었다.


사무실에 앉으면 이렇게 일해도 되나 싶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를 비교할 때 얼마나 성장했나? 2년 전 혹은 3년 전과 비교할 때 지금의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나? 4년의 시간 동안 쌓인 것은 무엇인가? 이래도 되나, 무엇을 해야 하나. 답을 모르는 질문을 안고 내일도 출근한다. 아내와 아이를 위해 돈을 벌러 간다. 잘 벌기 위해, 행복하게 벌기 위해, 내 삶을 위해 질문은 놓지 않는다. 그리고 출근하면 질문은 잠시 제쳐두고 다짐한다.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하는 만큼이 내 실력이다. 도망가지 않는다.


*봄이야. 네가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할지 아빠는 무척 궁금하다. 어쩌면 하고 싶은 일이 없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아빠가 기다릴게. 스스로 궁금해서 찾고 또 직접 해보고 선택할 때까지, 아빠가 먼저 초조해하거나 밀어붙이지 않도록 노력할게. 또 어쩌면 하고 싶은 일이 있겠지. 그렇다면 아빠게 도와줄게. 해보니 별 거 없어서 다른 걸 또 찾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와줄게. 봄이야, 네가 어떻게 하든 더 잘 도와줄 수 있도록 아빠가 몸과 마음 모두 잘 준비할게. 그렇게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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