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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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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Jun 15. 2016

봄이 여기 있어요

아 맞다, 나 아빠지

아내는 임신 15주 차로 접어들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입덧이 온 아내는 이번 주 들어 처음으로 된장찌개를 해 먹었다. 음식 냄새, 먹는다는 생각, 먹고 싶은 것이 없는 사실이 괴로웠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아내의 배는 아직 임신한 태가 나지 않는다. 조금 나왔나 싶으면 잘 먹고 배불러서 나온 거라고 하니 이거 참 ㅋ 


그래도 이제 봄이는 뱃속에서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한다. 15주 차에는 몸을 움직이는 법을 알게 되어서 손과 발을 움직이고 탯줄도 가끔 잡는다고 한다(!ㅇ!). 눈은 뜨지 못해도 빛을 감지해서 이제 아내가 이불을 덮으면 어둡고, 낮에 산책하면 밝은 것을 구분한다. 땀샘도 생기기 시작하고(뱃속에서도 땀을 흘리나...?) 혈관이 몸 구석구석에 퍼져 붉게 빛난다. 정말 경이로울 따름이다.


초음파 같은 영상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뱃속에서 아이가 크는 줄을 알아도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크고 있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르는 와중에 입고 먹는 것을 가리고 부정탄다는 행위를 삼가며 아이를 소중히 여겼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한 생명이 거기에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봄이가 아내 뱃속에 있다는 걸 잊어버린다. 초음파로 봄이를 볼 때는 그렇게나 가슴이 뛰고 설레는데... 아내와 길을 걸을 때 둘레길 걷듯 성큼성큼 속도를 내다 아내가 내 등만 보고 걸은 적이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아내가 봄이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망각은 반복된다. 봄이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행동한다. 처음에 아내가 이야기해줘서 그러고 있는 줄 알고 정말 깜짝 놀랐다. 나 아빤데 왜 이러지... 그러고 나서 말짱 도루묵이다. 


돌아보니 나는 아내만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아내가 임신 전과 다르게 행동할 때 비로소 아 임산부구나 했다. 뭔가 불편해하거나 낯설어하면 '임신'을 떠올리고 나름대로 대처했다. 여러 순간이 쌓이면서 아내를 임산부로 인식하는 순간이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많아졌다. 그러나 '임신'이 '봄이'로 연결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였다. 이게 핵심이었다.


남자는 단순해서, 여자는 뱃속에 직접 아이와 함께 있어서 체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피와 살로 연결된 엄마와 그렇지 않은 아빠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초음파로 심장소리도 듣고 생긴 모양도 보고 났는데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직 내가 아빠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아빠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 회사에서의 비전과 미래의 삶을 걱정하다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사는 가련한 가장이 된 나를 상상했다. 암담하고 억울했다. 그런데 이 상상은 출발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 조건에서 나의 삶을 찾는 것이지, 나의 삶을 찾고 나서 아내와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아내와 봄이가 지금 나의 삶이고 뿌리다.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거였다. 내가 살아가는 이 자리에서.


시선을 달리하니 시원해졌다. 그래, 나는 아빠다. 폭발하듯 성장하는 15주 차 아이의 아빠다. 아이가 있다는 걸 종종 까먹는 초짜 아빠다. 그리고 앞으로 누구보다 봄이를 아끼고 사랑할 아빠다. 그런 줄 아는 것이 아빠로서 나의 자부심이자 존재감이다. 아자!


*민지야, 지금의 나를 인정해주고 깨우쳐주고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아내가 있어 나는 참 행복하다. 곧 너의 배가 불러오고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면 조금 더 아빠 노릇을 잘할 수 있겠지? ㅎㅎ 그때까지 너 잘 챙기면서 봄이도 챙길게.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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