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cm의 작은 기적
오늘은 2달 만에 봄이를 보는 날이었다. 미리 진료를 예약해두었고 나는 휴가를 냈다. 얼마나 자랐을까, 어떤 모습일까. 감각으로, 상상으로 만나오던 봄이를 오늘은 초음파의 도움을 받아 만나게 된다. 진료 보면서 동시에 초음파로 볼 줄 알았는데 정밀초음파를 찍고 난 뒤 그 결과를 보고 진료를 받기로 했다.
정밀초음파는 원래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하게 되느라 약간 기다리게 됐다. 기다리는 동안 아내와 나는 물을 계속 마셨다. 그러다 아내가 소변을 보고 나오는데 간호사들이 '화장실 다녀오시면 안 되는데' 한다. 방광에 물이 있어야 더 잘 보인다나... 반대인 줄 알았다. 일단 초음파를 보러 들어갔다.
봄이는 머리를 왼쪽 위에, 다리를 오른쪽 아래에 두고 있었다. 정밀 초음파라 그런지 보이는 디테일이 달랐다. 척추가 둥그렇게 휘어있고 그 아래로 갈비뼈가 날개깃처럼 달려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보이고 살짝 오므린 손아귀가 보인다. 길쪽한 팔 뼈와 허벅지 뼈가 단단해 보인다. 심장은 2심방 2심실이 뚜렷이 구분되어 보이고, 좌뇌 우뇌 공간도 무사히 채워져가고 있다. 양말을 매번 구멍 내는 내 둘째 발가락을 닮았나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왼발, 오른발 모두 귀엽게 잘 있었다. 콧대가 생겼고 콧구멍도 뚫려있다. 입술 라인이 생겼고 귀도 모양을 갖췄다. 위와 간을 비롯한 주요 장기들이 있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초음파를 봐준 선생님이 길이를 잰다. 머리 끝에서 엉덩이까지 15cm. 내 엄지에서 검지를 쭉 뻗은 거리보다 작은 공간에 봄이가 들어온다. 15cm 안에 눈, 코, 귀, 입, 어깨, 팔, 손, 손가락, 다리, 발, 발가락, 엉덩이, 허리를 갖춘 봄이가 있다.
이리저리 봄이를 보아주던 선생님이 아무래도 물이 없어서 잘 안 보인다며 물을 좀 더 마시고 다시 보자고 하신다. 그렇게 나와서 아내는 물을 마시고 나도 마시는 사이 아내의 방광은 찼고 그 사이 다른 산모가 정밀 초음파를 보러 들어갔다. 아내의 방광은 점점 압박이 심해졌고 덩달에 간호사들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다리를 베베 꼬며 앉아있기도 힘들겠다 싶은 순간, 다시 들어가게 됐다.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났다. 2시 예약이었는데 벌써 4시가 다 됐다. 본격적인 진료는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_-;;
다시 자리에 누워 젤을 바르고 초음파를 보았다. 물로 꽉꽉 채운 방광 덕분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자궁경부가 잘 보인다. 안전한 길이임을 확인하고 이제 소변을 보고 와도 된다 하신다. 아내가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찬찬히 봄이를 본다. 그런데 다시 보니 왼쪽 위에 있던 머리가 오른쪽 아래로 가 있다. 그 사이 자세를 바꾼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봄이는 손을 오므렸다 피고 등을 구부렸다 피고 다리를 접었다 눕히고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선생님은 자기를 안 도와준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지만 나는 흐뭇하기만 했다. 한편으로 의아하기도 했다. 아내와 나 둘 다 엄청 활발한 타입은 아닌데 어쩐 일이지? 이러니 저러니 활발하게 꼼지락거리는 봄이의 모습을 보니 살짝 전율이 일었다. 15cm의 작은 기적이다.
봄이가 있던 자세 때문에 몸 중심은 자세히 볼 수 없어서 성별은 확인하지 못했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다음번 초음파를 찍을 때 혹은 세상 밖으로 나올 때 확인하게 됐다. 집에 와서 부모님께 전화하니 아빠가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떻니 하신다. 엄마는 왈가닥 나오는 거 아니니 웃으신다. 알 수 없어서 오히려 설렌다. 이 설렘으로 봄이와 만날 날을 손꼽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