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근종통이 온 것을 계기로 봄이와 나, 세 가족이 대화하는 걸 주제로 글을 썼다. 여전히 아픈데도 덜 아프다는 이유로 강의를 들으러 가겠다는 아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제발 안 아팠으면 좋겠다고, 이 아픔이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두려워하던 사람이 조금 괜찮아졌다고 강의 들으러 가겠다는데(집과 가깝지도 않다)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단호박 모드가 되어 가지 말라고 딱딱 말했다. 제정신이냐, 아직 네가 덜 아픈 게로구나, 다시 아프고 싶은 거니 등등. 그런 내 대답의 톤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용은 일리 있다고 여기는 아내의 표정은 복합적이었다. 거기에 그래도 가고 싶다는 표정이 더해지니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표정이었달까.
그러면서도 나와 봄이의 의견을 물어서 하려고 한다는 아내의 말에 놀랐다. 속으로는 그냥 가겠다고 정했는데도 굳이 내게 물어보고, 또 봄이와 어떻게 상의하면 될지 고민하는 아내가 존경스러웠다. 나도 셋이 대화해서 선택해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일상에서 직접 실천하는 걸 보니 역시 고수구나 하며 감탄했다. 그래서 무척 뿌듯하고 또 기뻤다. 그렇게 아내의 글을 흐뭇하게 읽었다.
그런데 글을 다 읽고 나니 문득 나는 봄이와 어떻게 대화하고 있나 궁금해졌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봄이가 온 뒤 아내가 계단을 오르거나 오르막길을 오를 때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면 뒤에서 가만히 허리를 밀어준다.
장을 볼 때 어지간한 짐은 거의 다 내가 든다.
(종종) 아침에 나서기 전과 밤에 자기 전 봄이에게 인사한다.
이 정도였다. 봄이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은커녕 몸이 무거워진 아내를 돕는 게 더 컸다. 봄이가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은 아주 짧고 휙 지나갔다. 이 생각을 한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순식간에 나 자신을 기준에 못 미치는 아빠로 떨어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빠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내가 너무 소홀한 게 아닌가 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잘 몰랐지만)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을 세워 놓은 나는 너무나 쉽게 나를 몰아붙이곤 한다. 이 정도는 해야지, 저만큼은 가야지 하면서. 그렇게 긴장하고 갑갑하고 쫓기는 듯 지내온 순간이 많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익혀온 생존 방식이거나 주위에서 보상을 받아온 노하우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회사 일을 하면서도 이렇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게 나의 34년 인생에 걸쳐 쌓아온 것이라면, 오르막길에서 아내 허리를 밀어주고, 장 본 짐을 내가 들고, 아침저녁으로 봄이에게 인사하는 정도가 지금 내 실력이고 내 최선이 아닌가? 정말 그렇다면, 더 자주 봄이를 인지하고,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셋이서 상의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가야 할 길이지 않은가? 정말 그렇다면, 아내와 꽤 잘 지내고 있는 나는 내 실력만큼 잘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고민과 후회와 자책을 무한 반복하다 문득 지금의 내 현 위치로 돌아왔다. 고민과 후회와 자책에 빠져있는 만큼 내가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성인군자나 깨달은 사람인 줄 착각했다. 착각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들들 볶았다. 그만큼 인생 놀이를 했다.
제대로 인생을 사는 것은 지금의 내 모습이 본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는구나 실감한다. 그래, 지금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 이런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도 그렇고 봄이도 같다. 셋이서 콩콩 벽에도 부딪히고 걸려 넘어지기도 하다가 서로 위로하고 끌어안으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니겠나. 그만큼 아내와 봄이와, 그리고 내 안의 작은 아이와 만나가는 게 아니겠나. ㅎㅎ 시원시원하다.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자 훌륭한 선생님인 아내와,
한결 선명한 거울과 위대한 선생님의 포텐을 가진(것으로 짐작하는) 봄이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