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미 Jul 23. 2016

금요일 야근을 마치고 가는 길

끝나지 않은 일을 끌어안고

얼마 만에 해보는 금요일 야근인가 생각하다가 완전 처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살짝 머리가 아프다. 그래 아마 처음은 아니고 두세 번째 정도는 되지 않겠나 넘어가련다. 사무실에 홀로 남아 사내 메신저를 둘러본다. 누가 또 남아있나. 일단 11층에는 2명뿐이다. 나 말고 회계팀에 한 사람. 괜히 말을 걸고 싶지만 친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다. 하릴없이 텅 빈, 몇 시간 전만 해도 빛과 사람으로 채워져 있던 공간을 둘러본다. 내 자리만 켜져 있는 천장 등이 무대의 스폿라이트 같다. 새삼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그러다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리자 금세 극에 몰입하는 배우처럼 일의 노예가 된다.


지금 하는 일은 초음파 진단기와 치료기를 만들어 파는 자회사의 중장기 전략을 짜는 것이다. 과장-부장급 선배들도 각 하나씩 회사를 맡아 작업 중이다. 원래 이 일은 왕남이 하기로 되어있던 건데 퇴사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게 떨어졌다. 그간 일다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하던 나인데 막상 맡아보니 숨겨놓은 말이 있었다. (선배를 도우며, 보조하며, 시키는 걸 하면서 배워가며) 일다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상무님에게 가이드를 받긴 했지만 들을 때는 그럴듯하던 것이 돌아서서 내 자리로 오면 깜깜해져 버린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 걸까.

내 코가 석자인데 상무님은 RA(Research Assistant)를 3명 뽑아서 내 밑으로도 1명을 배정했다. 그에게 일을 줘야 하는 일이 추가됐다. 일단 끄적거려서 필요한 듯 보이는 일을 줬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한다. 점심 먹다가 물아보고 휴가 가 있는데 연락 와서 물어본다. 그의 성실함과 적극성을 응원하고 싶다. 인턴만 4번을 한 그에게 이번에도 단기 직장으로만 끝내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2달 후 면접에서 4명 다 뽑힐지, 다 탈락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물어보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때도 꽤 있다. 나도 모르니까... 


이러니저러니 상무님이 해외출장을 간 1주가 다 갔다. 어떻게든 초안이라도 만들어놓아야지 했던 목표는 주말로 미루게 되었다. 회사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나오는 길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느긋함과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불안이 뒤섞이는 통에 평소보다 가방이 무거운 것도 몰랐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었다. 등에 얹은 이 긴장을 떨치고 싶어서. 아무려나 오늘은 주말 전야이므로. 


지하철에서 쓰기 시작한 것을 귀가 후 책상 앞에서 마무리한다. 

금요일에 쓰기 시작한 것을 토요일에 마무리한다.

스트레스로 쓰기 시작한 것을 홀가분함으로 갈무리한다.

내일은 늦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순간이 참 좋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