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성장보고서
아내와 간식으로 단호박을 먹었다. 먹다 보니 한 조각이 약간 시큼한 맛이 났다. 과육이 엷은 액으로 덮여있다. 시큼한 맛과 냄새의 정체를 발견했다. 못 먹겠네 하고 단호박 조각을 이리저리 손으로 돌리다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넣고 레버를 눌렀다. 잘 내려갔다.
훗날 아내는 그 순간에 화장실로 향하는 나를 말릴지 말지 무척 망설였으며, 망설이느라 음식물쓰레기로 처리하라고 말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왜 그랬냐 물어도 남편은 말이 없었다.
어리석은 남편은 말이 없었다. 왜냐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왜 그랬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귀찮았다.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열고 큰 덩어리를 넣을 걸 상상만 해도 귀찮아서 쥐가 날 것만 같았다. 변기에 퐁당 단호박이 빠지고, 손가락을 레버로 향하고, 지문이 레버에 닿고, 지그시 힘을 주어 누르라는 뇌의 명령이 손끝에 다다를 때까지만 해도 불안했다. 불안해하며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맹신으로 불안과 귀찮음을 덮었다.
다음 날 저녁, 화장실에 간 아내가 소리쳤다.
"오빠 이게 뭐야? 이리 좀 와봐."
변기에 고인 투명한 물에 녹빛이 올랐다. 낡은 수도관을 떠올리고 집주인을 탓하려던 찰나, 아 ㅅㅂ... 단호박이구나 알았다. 눈을 마주치자 아내도 알았다는 걸 알았다. 아내에게 일단 씻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변기 뚫는 법을 검색했다.
아내가 씻고 나오자 의기양양하게 주방에서 쓰는 랩을 들고 변기로 향했다. 변기 뚜껑을 열고 랩으로 변기를 덮었다. 레버를 눌러 물이 내려갈 때 위에서 손으로 같이 눌러주면 압력이 생겨 변기가 뚫린다고 했다. 레버를 눌렀다. 랩을 눌렀다. ㅅㅂ 아무 변화가 없다. 랩을 누를 때마다 공기가 새어나갔다. 이게 아닌데 하며 다시 시도했다. 아.. 물이 덜 내려가 있는 걸 보고도 홧김에 레버를 눌러버렸다. 물이 차올라 랩이 부풀었고 이내 넘치고 말았다...
다행히 단호박 가루로 추정되는 물체뿐이었지만 두피에 소름이 돋았다. 넘친 물과 건더기를 처리하고 욕실 머리카락 제거용으로 둔 옷걸이를 들었다. 구부리고 펴서 변기 구멍을 한참 쑤셨다. 단호박 가루로 추정되는 것들이 부유했다. 물이 조금씩 수위가 낮아지는가 싶더니 다 빠졌다. 다시 물을 내려보니 쑤아아아~ 까지는 좋은데 콰르르릉 하고 내려가지 않고 쑤아아아....... 하다가 쿠르...러..ㅇ 한다. 소리를 듣자니 속이 터졌다.
다시 검색했다. 페트병 이야기가 나왔다. 2리터 생수통의 윗부분을 자르고 거꾸로 잡고 펌프질 했다. 계속하다 쿠르르르 하며 내려갈 때 희열을 느낀다며 네이버 지식백과가 알려줬다. 그런데 계속 꾸덕꾸덕 페트병을 구겨가며 펌프질을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속 터지는 소리로 물이 빠졌다가 다시 올라오질 않는다. 여전히 막혀있다는 증거... 얼마나 많은 물을 쏟아부었는지...
그러다 문득 물을 채우고 나서 펌프질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수위가 워낙 낮아서 물을 조금만 많이 넣어도 바로 빠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양을 조절해야 했다. 푸덕푸덕 펌프질을 하다 보면 꾸르르 물이 빠졌다. 확실히 물이 있으니 누르는 힘이 있다. 인터넷 동영상에서 본 어떤 여자는 딸기가 나왔던데... 나도 단호박이 나와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진짜 나오면 어쩌나 두려워하며 펌프질하고 물을 부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레버를 누르자....
캬하하하하하 뻥 뚫렸다. 느릿느릿 서재로 향했다.
"변기 다 뚫었어. 한번 볼래?"
아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느릿느릿 레버에 손가락을 올렸다.
"자 봐봐."
쑤아아아~ 하는 소리를 이어 꽈르르르릉! 천둥이 친다. 물을 실컷 삼킨 변기가 쓰으으으 하아아아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아내는 신나했다.
그 모습에 작은 감동을 받았다. 왜 그랬냐며 일을 사서 만든다며 책을 잡고 원망하는 대신에 남편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 것을 기뻐했다. 같은 것을 두고 어두운 면이 아닌 밝은 쪽을 보았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고, 2리터 페트병 하나만 있다면 어지간한 변기 따위는 두렵지 않은 용기가 솟았다.
단호박과 변기 덕분에 생활력 레벨+1과 아내의 따뜻한 응원을 얻었다. 다음번 변기 막힐 날이 기다려진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