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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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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Sep 22. 2016

이어지는 삶

아빠와 나와 아들

봄이의 존재감이 날이 갈수록 커진다. 이번 주 들어 29주 차가 되었고 예정일까지 딱 10주 남았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배에 손을 대어 보면 믿을 수밖에 없다. 꾸욱 미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이제는 손이 아니라 눈으로도 봄이가 보인다. 불쑥, 꿀렁 올라오는 아내의 배를 보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경이로운 이 생명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문하면 조급해진다. 생명의 무게가 훅 다가온다.


지난주 월요일 저녁, 우리 부부는 여느 때처럼 예능프로를 보며 놀고 있었다. 다 보고 난 뒤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는데 경주에 지진이 크게 났다고 했다. 뭔가 싶어 더 찾아보니 쇼윈도가 다 깨진 상점 사진과 심하게 흔들리는 경주 시내와 물건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건물 안 CCTV 영상을 볼 수 있었다. 페이스북에 경남권 사는 사람들이 집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는 글을 올린 걸 봤다. 다음 날 출근하니 선배들이 서울 집에서 진동을 느꼈다고 했다. 부산이 고향인 부장님은 부모님과 통화하며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내와 봄이를 떠올렸다. 이렇게 내가 회사에 와 있고, 아내와 봄이는 집에 있을 때 지진이 나거나 다른 일이 생긴다면? 이 상상 하나로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라는 표현을 이제까지 말로만 알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찔했다. 두려웠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내와 아이에게 일이 생긴다는 것의 무게를 실감했다.


내게는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봄이가 오기 전의 나는 전 세계에서 훨씬 무섭고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수히 보고 들었을 때 이만한 무게를 느낀 적이 없었다. 봄이라는 존재만으로 세계가 달라져버렸다. 그냥 그렇게 됐다. 지진을 대비해서 준비해놔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나를 1년 전의 나였다면 상상이나 했을까? 왜 그럴까를 궁리해보는 것이 부질없다 할 만큼,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나를 보았다. 아마 이것이 아빠의 존재감, 아들이라는 새 생명의 존재감을 알아차리는 순간이구나 싶다.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기억나지 않는 나의 태아와 유아기 시절, 아빠는 나를 보며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하셨을까. 한밤중에 열이 나서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 자지러지게 울었을 때, 아빠는 어땠을까. 친척집에 갔을 때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들이 집안, 동네에서도 보이지 않아 아이를 잃어버렸구나 했을 때 아빠는 어땠을까. 밖에 놀러 갔다 온다고 하더니 코에 나뭇가지가 박혀 피가 철철 흐르던 아들을 보며 아빠는 어땠을까. 장롱을 원숭이처럼 오르다 장롱째로 뒤로 넘어져 머리가 깨진 아들의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응급실로 달려가던 아빠는 어땠을까. 자라오며 그저 말로만 들었던 나의 사건, 사고 속에서 아빠는 어땠을까. 그리고 한창 크고 나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스리랑카에 1년 가까이 떠나 있는 아들을 떠올리는 아빠와, 입대해서 훈련소 가 있는 동안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대 가 있는 아들을 생각하는 아빠는 어땠을까. 결혼하는 아들, 아들을 가진 아들을 보는 아빠는 어땠을까. 지금 아빠는 어떨까.


알 수 없지만, 가만히 헤아려보면 알 것 같기도 한 일들이 내게도 일어날 것이다. 나의 아빠가,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가 겪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른 모양과 시점으로 나 역시 겪고 느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봄이도 그럴 것이다. 아빠가 되어가며 비로소 나의 아빠를 이해해간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선택을 할 수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내 안의 아빠를 알아가며 새 생명의 아빠가 되어간다. 이 모든 것이 생명에서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아빠의 삶이 이어져왔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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