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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Oct 02. 2016

봄이에게 말 걸기

태담에 관하여

우리 부부에게는 저녁시간을 보내는 패턴이 있다. 내가 칼퇴하고 귀가하면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좋아하는 예능(가끔 다큐)을 본다. 대개 밥을 먹으면 예능 프로의 절반을 보고, 거실로 이동해서 마저 본다. 예능을 보고 재밌었던 포인트를 얘기하다가 거실에서 게으르게 뒹굴거린다. 그러다 각자 회사나 산모교실 등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수다를 떤다. 그러다 한 명이 씻으러 가면 다른 한 명은 혼자 놀다가 교대로 씻고 안방에 가서 수다를 조금 더 떨다가 잔다. 이 패턴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봄이에게 말 걸기, 태담이다.


아내의 배에 손을 올려놓고 뱃속의 아이에게 말하는 게 사실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봄이에게 말할 때 아내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곤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 앞인데도, 아들에게 하는 말인데도 뭔가 부끄럽고 남사스러운 감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무슨 일이 있었어. 그래서 어땠지.' 몇 마디 하고는 냉큼 '엄마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아내를 놀리거나 실없는 말을 한다. 아내는 그냥 아무 말이나 하라고 하는데 그게 내게는 참 어렵다. 


돌아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학교 갔다 돌아온 내게 엄마는 무슨 일 있었냐 물었고, 나는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그리고 끝. 엄마는 더 얘기해보라고 했는데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서 '그게 다야. 다른 일 없었어.'라고 했다. 엄마는 남의 집 자식들은 집에 와서 미주알고주알 한다는데 너는 어찌 그러냐며 혼을 내는 것과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 사이의 무언가로 내게 말했다.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상대가 더 얘기해보라고 할 때 얘기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나는 할 만큼 했는데 더 내놓으라는 말로 들린다. 기준을 높게 요구한다 싶어서 그냥 피하고 싶다. 그래서 말을 줄인다. 


얼마 전의 일도 그랬다. 묘하게 피곤한 한 주를 보내고 누웠는데 아내가 봄이에게 태담 좀 해주라고 했다. 나는 태담을 하고 축구 하이라이트를 봤다. 그러자 아내가 '한마디만 더 해줘'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난 다 했는데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생각이 올라왔고 

"원래 아빠랑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고 그러면 그게 가장 좋은 태담이래."

라고 툭 던졌다. 그러자 아내가 

"그러면 봄이가 알아서 들으라는 거야?"

라고 되물었다. 나는 발끈했다. 그렇게 몇 번을 해달라, 왜 해야 하냐 주고받다가 내가 푹 찌르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봄이한테 태담을 안 하는 게 왜 너한테 서러운 일이야? 봄이가 서운하면 모르겠지만 니가 왜 서운해?"

이 말을 듣자 아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예상치 못한 서러움의 세기에 너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번 주와 오늘 나는 나름대로 아내에게 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아이한테 말하지 않는 게 아이가 서러우면 모르겠는데 엄마한테 그렇게 서러운 일인가? 그리고 나는 내 '태담'을 했는데 여기서 뭘 더 해야 하지?'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여전히 엉키는 와중에 서러움이 폭발한 아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내는 울며 내가 서럽다는데 그게 왜 서러운지 합리적으로 이해를 시켜야 달래줄 거냐고 되물었다. 땡~ 머리를 쳤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 맞다. 서러운 건 서러운 거지 어쩌라는 말이냐... 그 말이 백 번 천 번 맞다. ㅠㅠ 계속 합리로 감정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우리 싸움의 단골 패턴 ㅠㅠ


아내가 진정한 뒤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나는 한마디만 더 해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내가 바라는 이러저러한 모양에 맞춰달라는 말로 들렸고, 내게는 높아만 보이는 그 기준을 맞출 자신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1주일 간 봄이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내가 서운했지만 피곤해서 그랬구나 이해하며 넘어갔는데 오늘 그나마 해준 태담도 일을 치르듯 하는 게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살았던 한주였다. 배에 손을 올려보고 꿀렁꿀렁 움직이면 하하호호 신기하다 하며 넘어갔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나마 그런 순간도 얼마 없었다. 


우리가 얻은 답은 엄마와 아이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가 서러운 게 올라왔다는 거였다. 순간 울컥했다. 아내는 다만 아빠인 내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감정과 좋은 생각을 전해주는 행동을 바랐다. 아이와 친한 아빠가 되었으면 하는 엄마-아내의 바람이었다. 기술이 아닌 마음으로 봄이와 이야기하길 바랐다. 


그걸 몰랐다. 한 생명이 엄마 갈비뼈를 차고 아랫배를 퉁 두드리며 자신이 세상에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데, 그걸 보지 못하고 되려 무언가를 하게끔 만드는, 의무를 지우는 존재로 보았다. 의무는 남이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지는 것인데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봄이가 서러울 법하다. 심지어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미안하고 짠한 마음에 아내는 다시 눈물이 올라왔고 나도 그랬다. 


지금 봄이에게 전하는 감정과 생각, 행동이 나중에 아들과 아빠로 만나게 될 우리 두 사람 관계의 기초가 되겠구나 싶다. 내가 전하는 걸 봄이가 받는 부분도 있지만, 핵심은 내가 봄이에게 마음 전하는 법을 연습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오늘 나는 봄이와 어떤 것을 심을 것인가, 내일 나는 봄이와 어떤 것을 심어갈 것인가, 그리고 오늘과 내일, 모레 심은 것들은 어떻게 피어날 것인가. 


마음 내는 만큼 봄이와 만나간다. 이 만남의 이름을 태담이라 부르기로 한다. 봄이와 아내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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