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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Oct 08. 2016

어느 생일날

세 가족이 함께 한 나의 첫 생일

10월 5일은 내 생일이다. 아니, 내 생일은 10월 5일이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10월 5일생은 아주아주 많을 테니까. 서울에서, 한국에서, 아시아에서, 전 세계에서 10월 5일의 생일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로 모으면 아마 탄생에서 죽음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광활한 삶의 스냅샷이 오늘도, 내일도 새롭게 찍히고 있다. 이틀 전 내 생일의 첫 장면은 미역국이었다.


출근 준비를 할 때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아내가 가뿐하게 일어나 밥을 차렸다. 간밤에 미리 만들어 둔 미역국을 데우고 밥을 가득 퍼서 담았다. 아침 치고 양이 많았지만 맛있게 다 비웠다. 든든한 아침 기운으로 하루를 말똥말똥 보냈다. 중간중간 간식으로 싸준 당근과 찹쌀떡을 회사에서 야금야금 먹었다. 오후에 계열사에서 외부업체와 회의가 있어 이동하는 중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 외부업체와 회의가 끝난 뒤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헐.


"아.. 사실 제가 오늘 생일이어서 아내하고 같이 보내려고 했거든요."

"아이고.. 그러시구나. 음 외부 업체 쪽에서 3명이 오는데 저희가 2명밖에 사람이 안돼서 3명을 맞춰야 할 것 같아요. 부장님이 같이 하자고 전하라셔서요."

"아 그렇군요. 음... 어쩌지 ㅋㅋ"

"ㅎㅎ 그러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일단 회사로 오시래요~'라고 한다. 알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냥 회사로 다시 복귀해야 한다라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아내와 저녁을 도란도란 먹고 싶은데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런데 그쪽 사정을 생각하면 내 일만 내세울 수도 없고. 난감했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하고 싶어 전화를 걸었는데 하필 전화가 꺼져있다. 회사는 다 와가고 초조했다. 카톡도 보내고 문자도 보내 놨다. 괜히 아내가 많이 서운할 것 같아서 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보면 내심 회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정해놓고 아내에게 상의하는 척하느라 쫄렸던 것 같다. 다행히(?) 아내는 가볍게-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아쉬운 건 아쉬운 대로 남긴 채- 나보고 무리하지 말고 갔다 오라고 했다. 혼자 밥 먹을 걸 생각하니 미안하면서도 상황을 이해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계열사 대리님께 문자를 보냈다. '대리님, 저녁자리 참석하겠습니다 ㅋㅋ'


회사 도착 후 부장님과 옥상에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왕남의 근황 이야기도 들었다. 더 좋은 조건의 직장에 취직했고, 성과를 달성하면 팔자를 고칠만한 정도의 인센티브를 받을 거라고 했단다. 역시 왕남 ㅋ 그러다 건강에 대해 조심스레 여쭤봤다. 신장이 좋지 않아 휴직(사실상 퇴직)을 결정하신 부장님은 후임이 정해지지 않아 예정보다 더 오래 다니고 계시다. 본인 밑에 직원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신다. 술과 담배를 조심해야 한다더라, 나트륨과 단백질 조심해야 한다더라, 의사는 당신의 즐기는 인생은 이제 끝났다더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게 왔나 하신다. 그러면서 담배를 하나 빼어물고 불을 붙인다.

"알면서도 이러고 있잖냐 내가 ㅎㅎ. 야 삶에 낙이 없다. 나트륨 안 먹는 게 뭐야, 간이 안 된 거지. 단백질은 고기 아니냐. 먹는 거가 그러니까 도대체 재미가 없다."

"그러게요. 스님도 아니고 ㅎㅎ 그래도 형수님 생각해서 조심하셔야죠."

"그래 맞아. 이제 여기서 투석까지 가면 정말 갈 때까지 가는 거지. 그건 되지 말아야지. 그래서 오늘 회식 때 술 많이 못 먹는다. 그쪽 박상무도 나 이런 거 알아서 안 권해. 대신 니가 좀 먹어줘라. ㅎㅎ"

"네 알겠습니다 ㅎㅎ"


외부 업체와 회의가 끝나고 근처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얘기 들었던 대로 박상무님은 부장님에게 소주 대신 사이다를 따라 건넸다. 부장님은 이 사람이 내 집사람보다 더하다며 투정을 부렸다.

"이 맛있는 걸 자기만 먹으려고. 나 이거 안 마셔~"

소주를 잔에 따르려 하자 박상무님이 정색하고 잔을 뺏었다. 부장님은 못 이기는 척 웃으며 사이다를 원샷했다. 빈 잔이 내게도 돌아와 소주를 마셨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맥박이 빨라진다. 부장님의 빈 잔을 보고 나도 사이다를 따랐다. 문득 부장님이 '이 친구 오늘 생일이래요.' 하셨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박상무님과 같이 온 직원이 나를 봤다. 계면쩍게 웃으며 네 생일입니다 했다. 축하해요, 술잔이 돌았다.


상무님과 직원이 담배를 피우러 가는지 자리를 비웠다. 우리끼리 얘기하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아니, 이게... 아니 이렇게까지"

어버버 하는데 상무님이

"앞으로 우리 오래 봐야죠. 적어도 4~5년은. 잘해봐야지 ㅎㅎ"

하신다. 거들먹거리거나 대가를 바라는 음흉함은 없었다. 솔직한 이해관계로 만난 관계가 이렇게 담백하고 깔끔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 잘 되고자 하는 일의 근본을 배운 느낌이었다. 뜻밖에 받은 이 선물을 얼른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곧이어 사람들이 삼겹살 집에서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축하노래를 불러주었다. 오늘 처음 본 성인 남성 3명-30대, 40대, 60대-이 내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60대 고문님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촛불을 껐다. 8시 30분. 상무님의 '오늘은 짧고 굵게 하시죠!' 하는 멘트와 함께 1시간 반 남짓한 회식자리가 끝났다. 꾸벅 고맙다 인사하고 얼큰하게 머리로 오르고 다리로 뻗치는 술기운을 느끼며 커다란 케이크를 손에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내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취사 버튼을 안 누른 줄 몰라서 늦었다 한다. 밥 먹는 아내 옆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밥을 먹고 아내가 냉장고에서 아띠제 글루텐-프리 쇼콜라 케이크를 꺼내왔다. 카스테라처럼 생긴 단단한 케이크에 발로냐 초콜릿과 프리미엄 코냑이 들어있는 고급 케이크다. 진한 풍미에 야금야금 먹을 디저트가 생겨 매우 행복했다. 이어서 백화점에서 산 삐에르가르뎅 푸른색 셔츠를 건넸다. 검은 테두리를 두르고 빨간 실로 고정된 흰 단추로 포인트를 주었다. 몸에 닿는 촉감이 부드럽다. 입어보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아내가 배가 꾸물거린다며 손을 대고 있다. 나도 만져보자 하는데 아내가 손을 뗀 자리에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

둘 다 깔깔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봄이에게 고맙다고 하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술기운에 까무룩 잠이 들었고 다음날까지도 포스트잇이 떠올라 실실 웃었다.


생일에는 사실 온갖 업이 올라온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를 잘 보내면 반년 치 업을 풀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에 아내와의 오붓한 시간 대신 회식을 가야 하는 상황을 미워하다가, 아내의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흐르는 대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의 케이크와 축하도 받았고,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잘 하라던 왕남의 조언을 실제로 실천하는 젠틀한 상무님을 만났고, 회식은 일찍 끝났고, 아내의 선물과 이벤트 세례는 너무 재밌고 행복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생일이 아내, 봄이와 함께 시작하고 또 아내, 봄이와 함께 끝났다.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봄이의 첫 생일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재밌고 행복한 날이 될 것 같다. 세상의 무수한 생일 중 단 하나뿐인 어느 생일날이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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