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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과 업을 일치시킨다는 것

취미가 일이 되면, 정말 나쁜가요?

by Han

"전교 2등 오타쿠"


고등학교 때 저의 별명이었습니다.


어찌나 오타쿠였으면,

문과 학생인 제 만화 사랑을

물리 선생님이 알 정도였죠.


그래서인지 누군가 저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마다,

'뭐가 되었든 만화랑 관련된 일이요!'

라고 대답하고는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담임 선생님은

인자하신 미소를 지으며

'저런 애가 반 1등이라니...'

라는 표정을 짓고는 하셨답니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어엿한 성인이 된 나이 26살


저는 드디어 웹툰/만화 플랫폼의

웹툰/만화 담당자로 입사하게 됩니다.


옛날옛적 전래 동화였다면

그렇게 왕자는 만화와 함께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끝나야했었던 이야기,

과연 3년이 지나간 지금은 어떨까요?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


첫 출근길이 기억납니다.

어찌나 반짝이고 신나는 출근길인지,

아주라는 말을 넘어 매우라는 표현이

붙을 정도로 설레었는데요.


이게 왠걸, 저를 반겨주는 것은

광활한 대지에 덩그러니 놓인 인수인계 서류와

입사 3일 전 퇴사했다는 전 담당자의 소식...

전 이렇다할 사수도 없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만화를 팔락이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열정을 불태우며 일을 배우고,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던지기도 했었는데요.


'좋아함'을 태우며 열중하는 순간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진 않았습니다.


웹툰 플랫폼 담당자가 뭔가

창의력이 많이 필요한 일을 할 것 같지만,

의외로 기계적인 일의 반복이 많고,

감정이 소모되는 일도 많습니다.


물론 어떤 일이든 안 그렇겠냐만은,

전 특히 제가 좋아하는 만화 판에서

그러한 과정을 겪어 나가는 것에 대해

다소는 예민해져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1년 쯤이 지나고 나니,

제가 읽는 웹툰과 만화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물론 회사에서 읽어야 하는 기본적인 작품들이 있으니

절대값은 비슷했겠지만, 제가 먼저 책방에 들르거나

플랫폼을 뒤적거리는 일은 확실히 줄었었죠.


과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이게 맞나?

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 찰 때쯤,

전 또다시 한 작품을 만납니다.


바다를 달리는 엔딩 크레딧


[바다를 달리는 엔딩 크레딧]

- 타라치네 존 -


남편과 사별한 노인 우미코가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깨닫고,

미대 영상과에 지원하며 시작되는 이야기인데요.


"자기가 만든 영화를 봐 준다고 생각하면 전율이 일지 않아요?"


라는 대사를 읽는 순간 머릿 속에서

무언가 팡--! 하고 터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만화 판에서 일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저 만화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만화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고 싶어서 였다는 걸 떠올렸거든요.


결국 만화에 묻혀 사그라들던 흥미는

만화 덕분에 다시 싹을 피웠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매일 출근하며 펼치는

새로운 페이지들에 매번 설레일 수 있었어요.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읽으셨다면

다소 허망한 결말일 수도 있지만

현재 전 만화 쪽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벌써 반년 정도일까요?

지금은 비슷한 업무이지만

다른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굳이 일을 바꾼 이유는 만화 일을 하며

필요하다고 생각한 경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좋아하다보니 일에 개인적인 선호와 감정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자신을 발견하였거든요.


좀 더 객관적인 기준에서 일하는 건 뭘까?

숫자에 기반하여 일은 하는 방법은 뭘까?

를 고민하며 하는 일과 산업 구조는 아주 비슷하지만,

제 선호가 0에 가까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을 모두 꾹꾹 눌러 담아

추진력으로 만들어 만화판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양 무릎에 꽉-하고 힘을 주고 있습니다.


덕과 업을 일치시킨다는 것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일로 삼고 싶은 이유가 확고하다면

후회없을 선택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솔직히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잖아요?


지누시 작가의 '슈퍼 뒤에서 담배 피우는 두 사람'

1권에 나오는 대사로 이 글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서 계속하는 거라면,
다른 필요한 것들 전부 학생 마음을 반드시 따라잡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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