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작은 아이 안아주기
어느 겨울날이었다. 동네 골목길에서 12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중년의 남자 앞에서 엉엉 울고 있는 풍경을 보았다. 고작 초등학생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면서, 그 누구보다 서럽게. 그 작은 소년을 그리도 한스럽고 먹먹하게 울게 할 수 있을 사람은 가족밖에 없을 테니까, 그것도 아주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 남자는 분명 소년의 아비였을 것이다. 중년 남자는 이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보였다. 그는 달리 어떤 말도,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황망히 자리를 떠버렸다. 자리를 뜨는 것,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리액션인 것으로 보였다. 소년은 자신의 마음도 추스르지 못하는 작은 아이였지만, 그를 따라잡기 위해 눈물을 닦고 바닥에 내팽개쳐졌던 장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아이는 휘적휘적 앞서 걷는 그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고, 그들은 이내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왠지 모를 먹먹함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가만 서서 귀가를 잠시 늦추었다.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억수로 운 나쁘고 외로운 기러기 아빠인 주인공이 홀로 라면을 먹다가 감정에 북받쳐 냄비를 바닥에 휙 쏟아버리고,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는 표정으로 자기가 만든 상황을 곧바로 정리하는 모습을 담은 바로 그 장면. 감정이 제어가 안 될 만큼 속상하고 비참한 그 상황 속에서도 필히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니 장바구니를 챙겨 아비를 따라가며 스스로를 챙기는 소년과, 홧김에 쏟아버린 라면을 즉각적인 후회와 함께 재빠르게 치우는 주인공은 참으로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들 사이엔 수십 년의 세월 차이가 있지만, 사실 어리다고 해서 인생이 쉬운 건 아닐 테니까.
그 소년을 보며 내 어린 시절의 아이와 내가 사랑했던 이의 아이가 떠올랐다. 지금은 매 분, 매 초 가슴 먹먹게 사는 사춘기는 지내 보낸 성인이라 이제 그 소년과 소녀는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감금되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서로의 상처받은 소년과 소녀를 위로하며 어른이 되어가던, 아이도 어른도 아니던 중간 지점의 어떤 뜨겁던 시절. 필히 통과해야 하는 어떤 의례처럼 서로의 마음을 만져주고는 이내 달아나버렸던 미숙했던 시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나는 자동적으로 그의 아이 시절을 생각한다. 지금의 성인인 내가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함께 하루를 보내는 상상을 종종 하곤 한다. 상상 속에서의 나는 작은 그를 데리고 놀이동산에도 가고, 맛있는 것들을 먹이고, 예쁜 옷도 사주고, 넌 참 예쁘고 착한 아이라는 말을 해주며, 따뜻하고 안전한 포옹을 해주곤 한다. 그가 그 날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껏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되기를 바라며.
만일 그 장바구니 소년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상상 속의 나처럼 그 소년을 안전하고 따뜻하게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소년이 부디 아름다운 청년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아직 인생을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왠지 그 아이는 분명 아름다운 청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 그 맘 때 그토록 마음 먹먹히 살던 소년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지금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으니까. 어른스러운 소년은 비록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더라도 너무나도 예쁜 모습의 어른이 되더라는 사실을 몇 번 확인했으니까.
더 이상은 나도 화가 난다고 엄마 앞에서 엉엉 울지도 않으며, 어차피 다 내가 치워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이것저것 부수며 성질내지도 않는다. 어릴 때는 벽에 핸드폰을 막 집어던지고, 두 동강 내기도 했던 성깔 있는 소녀였던 것 같은데, 망가뜨린 핸드폰을 새로 사거나 수리할 생각을 하면 끔찍해서 지금은 아무리 화가 나도 폭신한 침대 위에만 살포시 던져버린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것일 테다. 화도, 짜증도, 그로 인해 벌어지는 후폭풍도 다 나의 몫이니 애초에 후폭풍이 생길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감정조차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것, 감정의 배설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는 것.
나는 그 장바구니 소년이 어떤 아이인지,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정말 그 남자가 아빠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정도면 먹먹하고 갈가리 찢어질 듯한 마음을 느끼기에 충분한 나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 소년, 그리고 이젠 청년이 된 우리, 비록 우리 수십 년 뒤 라면을 쏟아버리고 주섬주섬 걸레를 챙겨 오는 삶을 사는 어른이 되더라도 의기소침하지는 말자. 어리다고 인생이 쉽지만은 않은 것처럼, 어른이라고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우리 안의 아이는 언제고 불쑥불쑥 수면 밖으로 나와 때때로 마음 착잡하게 할 테니까, 우리 종종 그 작은 아이들을 꼭 안아주며 살자. 안아주고, 또 안아주고 사랑한다, 예쁘다 말해주다 보면 분명 조금은 더 나은 어른으로 자라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