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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Apr 27. 2016

가족, 가장 사랑하는 남

나의 미약하고 불분명한 뿌리가 시작된 곳

 어느 겨울, 나는 아빠가 나고 자라고 아직까지도 살고 있는 도시에 다녀왔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만났고, 아빠와 삼촌들과 고모들이 나고 자란 곳. 그리고 그들 역시 그곳에서 짝을 만나 자녀들을 키우며 살고 있다. 나 역시 한 때 그 도시에서 산 적이 있다.  내가 아주 작은 어린 아이일 때, 나의 할머니는 그녀의 자식들을 낳고 키웠던 그 집에서 장남의 장녀를 키웠다. 나는 유년 시절을 할머니 품에서에 보냈고,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나의 최초의 기억이 시작된 곳은 역시 그 집에서다. 



 나의 미약하고 불분명한 뿌리가 시작된 곳, 대전.



 4년 전, 나는 나를 키워준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2년 전, 나는 키가 크고 호탕한 성격이던 고모부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살다 보니 어처구니없이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설령 그 대상이 피붙이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내가 저항할 수 없는 일들은 나를 그곳에 머물게 하지 못했다. 



 아빠와 삼촌들과 고모는 무조건 할머니 산소에 인사를 가야 한다며 내게 전화를 했다. 술 한 잔의 취기에 흥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술의 흥에 겨워 거는 전화라 할지라도, 나 또한 그것이 몇 년간 반복되면 모른 척하고 한 번 정도는 내려갈 수도 있을 정도의 어른은 되어있었다. 그래서 갔다. 이제 술 마시고 전화 안 하겠지, 하는 맘에. 마지막으로 용돈이나 받아볼까, 하는 맘에 너무나도 오랜만에 시외버스를 타고.



 나의 아빠를 비롯하여 삼촌들과 고모, 그의 식솔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일했고, 학생인 조카들은 열심히 공부하거나 그보다 더 열심히 제 부모들의 속을 썩였다. 나 역시 그렇듯 다들 먹고사는 일이 녹록지 않아 보였다. 낯설었다. 아무리 나를 예뻐하고 아껴주던 가족이라 하더라도 한참을 떨어져 살았던 사이다. 나의 베이스캠프는 거의 일평생 서울에 있었으니 대전에서 일평생을 보낸 그들의 삶과 융화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첫 조카였다. 물론 지금은 내 밑으로 무려 6명의 아이들이 더 태어났지만,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첫 조카이고 첫 손주다. 비록 부모와는 떨어져 살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삼촌들과 고모와 할머니의 첫 정을 받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들은 여전히 나의 아이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대전에 살던 시절, 작은 삼촌은 나를 항상 놀리고 쥐어박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삼촌도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첫 조카가 예쁘고 신기했겠지만, 장난스레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걸 안다. 고모는 나를 물고 빨며 예뻐했다. 내게 끊임없이 옷과 신발과 치킨과 피자를 날랐다. 내 옷의 반절 이상은 고모의 지갑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큰삼촌은 왠지 어려웠다. 집안의 유일한 엘리트였고, 너무 점잖아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유일하게 큰삼촌에게만 존대를 한다. 



 드디어 할머니의 산소에 갔다. 친가 대대로 내려오는 선산이 있다는 것도, 집성촌이 있다는 것도, 그 집성촌 친척들이 딸기를 키우며 살고 있다는 것도 그 날 처음 알았다. 나는 참 모르는 것이 많은, 뿌리가 약한 사람이었다. 대전에서의 마지막 날, 점잖은 큰삼촌은 나를 태우고 선산으로 향했다. 멀쩡하던 날이 갑자기 험해졌다. 우리는 눈보라를 헤치며, 눈보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딸기를 키우는 비닐하우스를 한참 지나 할머니의 산소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이르기 전의 마지막 슈퍼에서 삼촌이 사 온 건 청주가 아니라 페리에였다. 어쩌다 그 읍내의 작은 마트에 페리에가 청주 행세를 하며 진열되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덕에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난생처음으로 탄산수를 드셨다. 날이 찬데, 아마 더 차고 청량했을 것이다. 



 다음에는 탄산수 말고 정말로 맛있는 청주를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나는 아픈 존재다. 서울로 보내야만 했던, 이 사람 손에 저 사람 손에 키우게 할 수밖에 없었던 첫 조카, 그리고 첫 손주. 제 삶을 사느라 평소엔 잊고 지내다가도 술 한 잔 하면 어김없이 전화 걸어 안부 묻고 싶은 존재. 그 조카는 벌써 이십 대 후반이 되었고, 그들 역시 시꺼멓고 까칠한 아저씨와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었다. 불안정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받은 사랑의 기억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겐 방학이면 대전에 내려가 몇 주간 지내다가 한아름 용돈을 받고 서울로 돌아와 신나게 놀러 다녔던 학창 시절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뿌리는 미약하고 희미하지만 그래도 기억만큼은, 지난 시절의 감각만큼은 선명하다. 우린 이미 서로의 삶이 너무나도 중요한 가까운 남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가족은 가족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거겠지.



 친구보다는 불편하고 남보다는 가까운 사이, 가장 사랑하는 남. 



 이십 대 후반의 나는 염치없게도 용돈을 한 아름 받아왔고, 대전에서 바로 대구의 친구 집으로 내려가 벼르고 벼르던, 좋은 소재의 두텁고 잘 재봉된 겨울 코트를 샀다. 마지막으로 고모와 삼촌들과 아빠가 사주는 옷을 받은 셈이었다. 다음에 만날 땐 또 몇 년이 흘러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내려오라고 했지만, 과연 내가 1년 뒤에 그 코트를 입고 다시 대전에 내려갈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음번엔 내가 뭐라도 드리고 와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서른 전에는 어른 노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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