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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Apr 21. 2016

늦은 오후의 장충단로

마음의 체기를 내리는 산책

 서울시에서 운행되는 버스들 중 내가 좋아하는 노선이 두 개 있다. 420번과 402번. 두 노선 모두 한강을 지나고 남산을 넘어 강남과 강북을 잇는 경로로 운행된다. 물론 남산을 오르는 다른 버스들도 많지만 대부분 터널을 통과하거나 둘레길로 다녀서 산을 볼 수는 없으니 별 다른 매력이 없다. 그래서 나는 강남과 강북을 오갈 때 한 두 정거장을 걸어서라도 굳이 이 두 버스를 찾는다. 서울 살이는 참으로 인정머리 없고 매정하지만 그래도 이 두 버스를 탈 때만은 산과 너른 강을 모두 볼 수 있어 즐겁다.



 그나마 한강과 남산이 없었다면 서울 사람들은 진작 다들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주말, 아주 오랜만에 오로지 나에게만 할당된 하루를 가질 수 있었다. 역시나 그 날도 빨래와 청소 거리가 한가득이었다. 아무리 열심이어도 생색 낼 수도 없는 수많은 집안일을 해치우고 나니 왠지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로 전 날 귀가 길에 탔던 420번 버스가 떠올랐다. 자주 보던 풍경이었지만 그 날 따라 창 밖으로 보이던, 태극당에서 국립 극장을 지나 한남대교까지 이어지는 장충단 길이 참 예뻐 보였다. 푸르러서였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이 길을 걸어 산책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나는 그 길을 걸었다.



 빨래를 널어두고 사극 드라마를 느긋하게 한두 편 보고 나니 벌써 오후 6시였다.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비가 올 것 도 같았다. 비 오는 날에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외출을 미루는 성격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은 굳이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나가야만 할 것 같았다. 냉장고 안의 샌드위치를 가방에 던져 넣고, 커피를 한 잔 사서 버스를 탔다. 순천향대학병원 근처의 긴 담벼락에는 푸른 담쟁이가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사이로 주황빛 능소화가 제 빛깔을 내고 있었다.



 서울의 여름 꽃은 이국의 꽃처럼 화려했다.



 한남대교를 지나 버스에서 하차해 남산을 올랐다. 늘 버스로만 오르던 길을 처음 걸어보려니 인도를 찾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좁디좁은 인도는 방음막과 주택가 사이에 가려져 있었다. 많은 이들이 걷지 않는 길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늦은 오후의 저녁밥 짓는 내음이 사방에서 끼쳐왔다. 언뜻언뜻 안이 들여다 보이는 빌라의 베란다에서는 러닝 셔츠 바람의 아저씨가 화분을 돌보고 있었고, 신혼집으로 보이는 어떤 작고 아늑한 집엔 노란 스탠드 불빛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작은 비에 내 마음은 다소 조급해졌지만, 그 조급함이 주말 저녁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꾸지는 못했다.



 약수까지 길을 잘못 들었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장충단로에 도착했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날이 습해 땀이 났다. 이게 무슨 대단한 여행이라도 되나 싶어 우습다가도 괜시리 마음이 들떴다. 소풍을 나온 기분이었다. 국립 극장을 지나 장충단 공원에 도착했다. 청계천에서 이사했다는 수포교는 아름다웠다. 연인들은 많았고, 아저씨들은 벤치를 하나씩 전세 내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하릴없이 공원을 휘적휘적 걸어 다니다 벤치에 앉아 땀을 식혔다. 땀은 금세 식었고, 나는 자리를 떴다. 근처 대학의 영화과 학생들임에 분명해 보이는 어린 영화학도들이 영화를 찍고 있었다. 몇 년 전 내 모습 같았다. 나도 그땐 이랬겠지. 



 그냥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오래된 빵집이 나왔고, 나는 그 빵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모나카 아이스크림 하나를 베어 물었다. 거대한 달팽이처럼 생긴 회색 건물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처음 지을 때는 다들 건물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험담을 했던 것 같은데, 막상 잘 지어 놓으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어있었다.



 나는 작은 달팽이처럼 느긋하게 그곳을 구경했고, 처음 가보는 방향으로 길을 건너 의류 도매 시장을 들여다봤고, 마네킹 가게들을 지났다. 외국 여행을 온 건지,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로 산책 나온 건지 혼란스러운 풍경이 이어졌다. ‘동대문은 아무리 자주 방문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과 ‘이 작은 산책도 여행이라고 우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갑자기 허기가 올라왔다. 나는 다시 거대한 달팽이로 돌아가 벤치에 앉아 늦은 저녁으로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배가 든든하니 뭐든 괜찮아졌다. 이만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몇 시간 전에 걸어 내려왔던 길로 돌아가 다시 420번 버스를 잡아탔다.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면, 이 산책 역시도 여행이었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어느 주말 늦은 오후 4시간 동안의 산책. 나는 그 날 유독 마음이 습했다. 해가 쨍하게 뜬 날 마음을 꺼내 탁탁 털어 널어 말리고 싶었다. 희망이 차오르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고, 무감각하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마음은 참으로 덥고 습했다는 사실이다. 그 온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테지. 심지어 나조차도. 그러나 나는 이내 괜찮아졌다. 원래 생이란 4시간의 산책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는 소박한 것일 테니까.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잘 위로하며 사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나는 집 지척의 곳에서 작은 산책을 하고 얌전히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마저 보았다. 그 드라마는 수도 서울을 건설했던 어떤 위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600년을 사이에 두고 나와 그는 같은 서울을 조망했다. 그의 대업에 비하면 내 마음의 습기는 너무나 보잘 것 없었겠지만, 어쩌겠는가. 우리 모두가 짊어진 나름의 삶의 무게는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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