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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Apr 29. 2016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삶

허상을 이기는 것은 실체, 그 하나뿐

상에서 가장 성실한 것을 꼽아 보라면 나는 '시간'을 고르겠다. 시간은 매몰차다. 사람의 바람이나 염원 따위는 개의치 않고 항상 앞으로 앞으로 흐르기만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재였던 시절은 과거가 되고, 애가 타도록 꿈꾸던 미래마저 언젠가는 영락없이 과거로 뒷걸음친다. 시간을 사람의 몸으로 비유해 보면 과연 어떤 부분이 나를 지배하고 있을까. 굳이 과거를 들추어내 고통을 환기시키는 머리일까, 만질 수 있고 자각 가능한 피부와 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미래의 어디론가 향하려 하는 발일까.



일생을 피부와 손으로 살아내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나는 종종 철 지난 기록 영화를 반복 상영하는 듯한 삶을 살기도 한다. 어떤 과거는 너무 아름다워서 기억 저편에 묻어둘 생각조차 않기도 하고, 어떤 과거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마 지워버릴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한다. 과거에 지배당하는 삶이 얼마나 딱한가를 체감하는 순간과 종종 마주한다. 때로는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찌꺼기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곰국처럼 푹 고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스불을 끄고 그 찌꺼기들을 하수구에 탈탈 털어버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 마음이 바닥을 드러낸 채로 새까맣게 타버릴 테니. 하지만 정말 아무런 힘도 남지 않은 상태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내 마음을 황망히 바라보는 일이 전부일 때도 있다.



 특히 사랑에 관해서는 반드시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고 싶다. 특히 현재를. 그대들과 내가 함께였던 찬란한 순간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일이 가치 있음을 제 스스로 증명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하루하루가 모여 미래가 될 테니, 결국 내일도 전적으로 오늘에 달려 있지 않겠나. 고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면 지금부터 곱게 살아가면 될 일이고, 똑똑한 아줌마가 되고 싶다면 지금부터 공부를 하면 될 일이다. 당신과 오래토록 함께이고 싶다면 지금부터 매일매일 당신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되는 것일 테니.



나는 오늘을 예쁘게 살아내어 결국 예쁜 미래를 얻게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사는 동안에, 빈번하지는 않지만 꽤나 심심찮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을 겪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러나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 형태가 외사랑이든, 연애이든 간에 지상의 모든 사랑은 언젠가는 끝을 맺는다. 포기, 이별, 죽음 혹은 또 다른 어떤 이유로든. 한 번 끝난 사랑은 반드시 잊어야 한다. 지난 사랑은 과거로 묻어둘 때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법이니까. 어쩌다, 아주 어쩌다 한 번씩 꺼내볼 수는 있겠지만, 결국 과거는 아무런 힘이 없으니까. 지나간 과거는 현재를 위한 지침서 역할 하나로 충분하다고. 그러니 그것들에서 교훈만 취하면 그만이라고. 잊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고, 행복을 빌어 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 거라고.



모두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사람이 사람을 잊어가는 과정, 한때 한 프레임에 담겨있던 두 사람을 각각의 프레임으로 옮겨놓는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고 외롭다. 2인칭의 존재를 3인칭으로 바꾸는 일 또한. 그렇지. 쉬울 턱이 없지. 그것이 쉽다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하늘에 올리고, 밤에 해가 뜨게 만드는 일도 간단하겠지.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과 기억을 조율하는 일은 더욱이 어려운 작업이겠지. 나의 시간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 등을 맞대고,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분절된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직선의 모양을 한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앞뒤가 없는 시간 역시 존재할 수가 없다. 곡선의 시간이 존재할 뿐이고, 원형의 시간이 강강술래를 하며 노닐 뿐이다.



우리의 시간은 모두 등을 맞댄 채 현재라는 시간을 씩씩하게 살아낸다.



 나는 사랑한다. 사랑했었고, 사랑할 예정이다. 과거는 침대 밑 박스에 담아두고, 현재는 책상 위에 올려두리라. 귀엽고 귀여운 현재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서 매일 만지고 쓰다듬고 키스하리라. 나의 키스를 취하는 이는 언제나 나의 현재가 되리라. 나의 사랑을 언제나 현재를 위한 몫으로 남겨두리라. 결국 나의 현재가 나의 미래가 될 테니.



결국 허상을 이기는 것은 실체, 그 하나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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