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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지아빠 Aug 17. 2019

자아와 이성

직관과 통찰

이성과 감정은 자아를 대표한다.

이 둘은 졸종 이율배반적이기도 하다.

감정, 이성 중 한 쪽에 치우친 사람을

위험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성에 치우친 사람을 종종 심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냉철한 이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아가 가진 가장 고차원적인 이성,

이성을 직관과 통찰로 다가가 보려 한다.




자아는 인식하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느낀다.

자아가 가진 고유의 능력이다.

이런 자아는 학습을 통해 슈퍼 파워가 된다.

지식이 쌓이지 않던 옛날 자아는 여기에 머물렀다.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죽거나,

전쟁으로 모든 게 파괴되거나 하면 지식은 사라졌다.

하지만 지식을 기록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지식은 없어지지 않았고, 후대에 전달되었다.

타인이 평생 쌓은 지식을 짧은 시간에 습득할 수 있었다.

인간은 학습을 통해 아주 빠른 속도로 똑똑해졌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었다.

자아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생각하며,

높은 수준의 판단력을 가지게 되었다.

간단하게는 배고픈 것도, 배아픈 것도 알게 되었고,

복잡하게는 미중 무역전쟁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내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고, 

자아는 이성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다.

 


내 아이는 올 해 9살이다.

아이는 엄마, 아빠한테 자주 혼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난 후 정리하라고 혼나고,

거실에서 뛰지 말라고 혼나고,

너무 늦게 밥을 먹거나, 반찬투정하면 혼나고,

숙제를 안 해도 혼난다.

세상 혼날 일들 뿐인거 같기도 하다.

일상에서 아이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익힌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년 이년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사회적 관습은 일상에서 아이한테 전달된다.

아이는 조금씩 판단을 하는 능력이 커진다.

그 때 그 때 아이는 판단을 한다.

사과를 보자마자 사과로 인식하는 것부터,

어지러운 장난감을 보고 어지럽다고 생각하는 것,

어지러워진 거실을 치워야 한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직관이라 한다.

직관적인 능력은 굉장히 오랜 시간,

천천히 몸에, 머리 속에 익혀진다.

그래서 한 사회 관습과 한 가정의 관습을 자아는 습득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리면,

다시 아이한테 그 관습들을 가르치게 된다. 



직관은 엄마, 아빠가 아이를 혼내는 숫한 반복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반면에 자아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을

통찰이라고 부른다.

통찰이라고 하는 것은 복합적 사고의 결과물이 된다.

예를들면 내가 좋아하는 정당에 대한 이유를 들 때나,

주식에서 어떤 주식을 사야 이익을 낼 수 있는지,

아이의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시켜야 하는 지 등등

복잡한 사고를 요하는 사고과정과 판단들을 통찰이라 한다.

통찰은 학습과 사고의 과정을 통해 극대화 된다.

아이가 아프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아이의 몇몇 증상을 듣고는 병을 유추해 낸다.

약을 통해 병을 다스려 보기도 하고,

진단이 어려울 경우 더 복잡한 검사를 받게 하기도 한다.

이런 판단들도 복잡한 사고에 의한 과정이 된다.

한 부분에 대한 높은 수준의 지식과 경험들이 통찰력을 높힌다.

높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을 예부터 우리는 존경해 왔다.

그리고 논쟁이 생길경우 그들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자아의 이성에는 그러나 한계도 있다.



사과를 보고 나는 사과를 생각한다.

미국 사람은 애플을 생각할 것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사과를 표현하면,

과연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직관이 가지는 경험적 지식은 이런 한계성을 가진다.

이는 통찰력도 마찬가지다.

학생은 공부에 대해서 높은 통찰력을 가지겠지만,

노동 현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가지는 직관과 통찰이라는 뛰어난 능력은

생각보다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자아가 가진 이성의 한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놀라운 능력과 그 능력의 한계.

이 한계를 인식함으로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생길 수 있다.

아이가 실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배우자와 부부싸움을 하는 동안에도,

이런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면 그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자아는 세상을 더 너그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냉철한 이성은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이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찰에는 생각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다.

이를 사람들은 철학 또는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절대로 변하지 않고 항상 옳은 것이 있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면 여자는 항상 히잡을 써야 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은 잘 못 된 행동을 한 것이다.

이 여성은 관습법에 의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고,

동네 사람들한테 나쁜 평판이 쌓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을 절대주의적인 가치관이라고 부르며,

절대적인 가치를 어기면 벌을 주거나 제제를 가하게 된다.

서양 중세시대,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절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공자의 말씀을 절대적인 가치로 따라야 했고,

신분차이는 명백한 가치라고 생각해 왔다.

아직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학습활동의 한계로 시대적 괴리감이 있는 사람들이다.



절대적인 가치는 폭력과 함께 하는 특징이 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절대 어기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어길 경우에 폭력을 통해 해결하게 된다.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는 이슬람을 이단으로 여겼다.

이슬람을 처단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떠난다.

이 때 기독교는 군대라는 폭력을 동원하게 된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자유를 외치고 도망가면,

양반들은 추노라는 폭력을 통해 그들을 쫒았다.

이 때도 폭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었다.

지금도 전세계는 절대로 옳다는 믿음이, 

다름이 아니라 틀린다는 결론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 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에 시달린다.



절대적인 것은 수천년 인류를 지배해온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를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

다만 절대적인 가치를 의심해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폭력이라는 거대한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중세 천 년이 지나자 절대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과를 보면서 왜 사과라고 하는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의심은 굉장히 중요한 변환점이 된다.

세계는 원래 존재하고 나는 그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나의 관계였다.

하지만 내가 잠들어 무의식에 빠지면,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세상은 나한테 없는 것이다.

이 생각하는 방식의 변경은 혁명 같은 것이었다.

나 자신, 사람이 중요한 시대를 여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 방식에 빠진 사람이라서,

종종 아내와 다투기도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신문들은 앞다퉈 부당한 요구라고 기사를 쏟아냈다.

경쟁 사회이기 때문에 노력해서 정규직으로 입사하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틀린게 하나도 없는 지당한 말씀이다.

아내는 나한테 이런 것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냐고 따졌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

하나는 경쟁사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규직은 시험을 통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사회와 시험을 통한 성공.

이 두 가지는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경제체제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경쟁을 통해서 일등하는 사람이 모든 부를 독식하는 방식이다.

부를 독식한 기업은 절대적인 가치를 어긴 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공권력이 투입되어 노동자를 해산시키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공권력이라는 폭력으로 이런 주장들을 묵살해 왔다.



자아가 가진 통찰력,

생각하는 방식이 결정하는 자아의 통찰력.

절대적인 가치를 의심해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어쩌면 묵묵히 공권력이 투입되는 것을 당연시 했다면,

폭력이라는 것을 묵인하며 허용한 것일 수도 있다.

절대적인 가치와 그것을 의심하는 통찰력이 자아가 가진 중요한 이성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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