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과 통찰
어지러워진 거실을 치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리면,
다시 아이한테 그 관습들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논쟁이 생길경우 그들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자아의 이성에는 그러나 한계도 있다.
아이가 실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배우자와 부부싸움을 하는 동안에도,
이런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면 그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를 사람들은 철학 또는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절대로 변하지 않고 항상 옳은 것이 있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면 여자는 항상 히잡을 써야 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은 잘 못 된 행동을 한 것이다.
이 여성은 관습법에 의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고,
동네 사람들한테 나쁜 평판이 쌓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을 절대주의적인 가치관이라고 부르며,
절대적인 가치를 어기면 벌을 주거나 제제를 가하게 된다.
서양 중세시대,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절대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공자의 말씀을 절대적인 가치로 따라야 했고,
신분차이는 명백한 가치라고 생각해 왔다.
아직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학습활동의 한계로 시대적 괴리감이 있는 사람들이다.
절대적인 가치는 폭력과 함께 하는 특징이 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절대 어기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어길 경우에 폭력을 통해 해결하게 된다.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는 이슬람을 이단으로 여겼다.
이슬람을 처단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떠난다.
이 때 기독교는 군대라는 폭력을 동원하게 된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자유를 외치고 도망가면,
양반들은 추노라는 폭력을 통해 그들을 쫒았다.
이 때도 폭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었다.
지금도 전세계는 절대로 옳다는 믿음이,
다름이 아니라 틀린다는 결론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 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에 시달린다.
절대적인 것은 수천년 인류를 지배해온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를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
다만 절대적인 가치를 의심해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폭력이라는 거대한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중세 천 년이 지나자 절대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과를 보면서 왜 사과라고 하는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의심은 굉장히 중요한 변환점이 된다.
세계는 원래 존재하고 나는 그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나의 관계였다.
하지만 내가 잠들어 무의식에 빠지면,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세상은 나한테 없는 것이다.
이 생각하는 방식의 변경은 혁명 같은 것이었다.
나 자신, 사람이 중요한 시대를 여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 방식에 빠진 사람이라서,
종종 아내와 다투기도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신문들은 앞다퉈 부당한 요구라고 기사를 쏟아냈다.
경쟁 사회이기 때문에 노력해서 정규직으로 입사하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틀린게 하나도 없는 지당한 말씀이다.
아내는 나한테 이런 것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냐고 따졌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
하나는 경쟁사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규직은 시험을 통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사회와 시험을 통한 성공.
이 두 가지는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경제체제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경쟁을 통해서 일등하는 사람이 모든 부를 독식하는 방식이다.
부를 독식한 기업은 절대적인 가치를 어긴 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공권력이 투입되어 노동자를 해산시키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공권력이라는 폭력으로 이런 주장들을 묵살해 왔다.
자아가 가진 통찰력,
생각하는 방식이 결정하는 자아의 통찰력.
절대적인 가치를 의심해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어쩌면 묵묵히 공권력이 투입되는 것을 당연시 했다면,
폭력이라는 것을 묵인하며 허용한 것일 수도 있다.
절대적인 가치와 그것을 의심하는 통찰력이 자아가 가진 중요한 이성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