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폭정을 휘두르고,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었다.
반란죄를 물으면 3대가 죽어야 했다.
폭군일지라도 왕이라면 옳았고,
정의로왔다.
틀렸다고 말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권력 독점은 늘 이런 부작용을 낳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폭정이 불가능할까?
사법, 입권, 행정이 분리되었으니 서로 견제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권력을 가진 기득권은 법망을 피해다녔고,
범법행위를 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취업청탁을 해도, 성추행을 해도,
이권을 챙겨 큰 돈을 챙겨도 그들은 그냥 넘어갔다.
답답하지만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권력을 가졌고, 많은 돈을 가지면,
법 위에 살 수 있구나 그러려니 해야했다.
그러려니 하면서 정치를 멀리하는 동안,
구린내나는 것들이 권력을 꽉 쥐어잡았다.
그런 그들을 법 위에 있게 만드는 집단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검찰이다.
일부 검찰이 그랬다.
일부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 노력할 때,
일부는 똥보다 더한 냄새를 풍겼다.
이들 모두에게 한 가지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선택적으로 정의를 찾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검찰의 몫이된다.
검찰이 선택하면 정의,
선택하지 않으면 정의가 아니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그들이 수사하고 기소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견제가 불가능한 막강한 권력인 검찰은,
절대 그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조국사태는,
검찰이 다시 정의를 선택한 경우이다.
검찰개혁을 하려는 자는 먼지도 없어야 하며,
수십번의 압수수색에, 가족을 궁지에 몰아도 버텨야 한다.
그런 자만이 검찰개혁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국이 아니면 사람이 없냐는 말을 한다면,
나는 없을 거 같다고 이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지금 검찰은 사실 시작부터 진 게임이었다.
지금 이 싸움에 이기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남고,
지면 검찰개혁의 명분을 명확히 제공하게 된다.
윤총장은 친일파라는 단어같은 사회악을 표현하는 호칭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난 검찰이 졌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권력을 일부 내려 놓는다면,
역사 속에 악인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지난 역사의 악인들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겨도 져도 명분이 남지 않는 게임에,
지나치게 많이 걸면 친일파 같은 불명예를 얻을 뿐이다.
예는 간단하다. 친일파를 보면 안다.
잘해봐야 역사 속 친일파,
못하면 일본의 개처럼 지내다 망가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