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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지아빠 Aug 02. 2020

나를 가장 사랑한다.

십 년 전, 30대 중반의 나이에 블로그에 쓴 글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다. 그 때 임신한 아내가 처가에 간 날이었고, 난 오랜만에 술이 떡이 되도록 먹고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겨울이었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려고 주전자를 불에 올려 놓고는 컴퓨터를 하다가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새벽에 너무 목이 말라 거실로 나오니, 집안 전체에 그을음이 가득했고, 유리주전자는 터지기 직전의 빨간색으로 달궈져 있었다. 그렇게 황천길을 앞에 두고 다시 삶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살아가는 방법을 바꾼 내용이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그 일을, 바로 지금 하라."


그리고 나는 나와 천천히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 때까지 난 해야 할 일들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해야할 일들을 더 잘하기 위해서 영어 공부도 틈틈이 했고, 자기개발을 하기 위해 더 힘썼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했고, 새벽같이 회사 통근버스를 타야했고, 통근버스 안에서는 기절하다 싶이 잠이 들었고, 회사에 도착해서는 끝없이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다른 일을 할 남은 힘이 없었다. 나처럼 회사를 다녀온 아내와 함께 쇼파에 나란히 앉을 때면 쇼파에 점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티비는 그런 우리의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해야할 일만 하는 것도 하루하루가 벅찬 상황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맞을까? 그저 막연히 은퇴 후에 하고 싶은 것들은 있었지만, 그것을 지금 당장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반복되었다.  


그것이 내 자아와 깊은 대화를 시작한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오로지 내가 나에게 묻고 답하는 깊은 대화였다.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포함되지 않는 내 자신에 대한 깊은 질문과 답이 시작되었다. 난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아빠, 누구의 친구, 누구의 동료라는 타이틀을 가볍게 털어낼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내 자아는 점점 색깔이 생겼던 것 같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나와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 느낀다. 우선 죽음에 대한 생각이 아주 많이 바뀌었다. 그 때는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온다는 절대 진리에 겨우 다다른 수준이었다. 그래서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집중했다. 지금도 죽음이라는 절대 진리에서 삶을 찾아가는 방법은 동일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한결 작아졌다. 그건 아마도 지난 십 년 내 자아가 진정 원하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삶의 부족함과 간절함이 줄어든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삶이 한결 여유를 찾았다. 나는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가족한테도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타인도 타인을 가장 사랑할 것이라 인정하기 시작했고, 타인의 행동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들보다 앞서 남을 배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 아내일지라도, 내 아이라도 그렇다. 다만 관계는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기에 내가 타인을 대하는 나의 태도만 신경 쓸 뿐이었다. 남을 신경쓰지 않으면 관계는 훨씬 간결해 진다.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지는 처음부터 나의 몫이 아니었다. 세계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해 왔지만, 나한테는 내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만  세계는존재하는 것이기에 내 자아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루 하루 정신없이 살아가는 도중에, 우연히 뒤를 돌아 볼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그 느낌을 이렇게 남겨 보게 되었다. 남을 위해 사는 모든 분들이 이제는 자기를 위해 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지금처럼 50대 중반이 된 내가 지금의 나를 다시 보게 될 때도 지금처럼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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