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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 여성, 여행자

안전하게 여행하고 싶어요.

by 다다

겨울이었다. 이탈리아 볼로냐의 한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탄 엘리베이터에서 중년의 서양 남성이 대뜸 나에게 자기 방에 같이 가자고 했다. 엥?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다시 물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나랑 내 방에 같이 가자,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와 그 남자 둘만 있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성희롱을 당하는 중이었다. 나는 ‘매우’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 이런 행동은 굉장히 무례하니 사과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나에게 “와이(Why)?”라고 되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그 질문을 무시했다. 대답이 없는 나에게 재차 같이 가자고 요구했다.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담담한 척 무시했지만 나는 무서웠다. 그 남자와 나는 같은 층에 내렸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러나 아주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와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내방까지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는데 그 열 발자국을 걸어가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 남자가 나를 쫓아와 내 방에 들어오지는 않을지, 만약 이 키를 대고 문을 열고 들어와서 문을 닫으면 이 문이 잠길 때까지 몇 초가 필요한지, 저 남자가 내 방에 침입하는걸 성공한다면 담배 피우러 간 룸메이트가 방으로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내가 몇 분 정도 저항하면 룸메이트가 돌아와 이 상황이 끝나게 될지를 계산했다. 그 열 발자국 사이에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계획을 짰다. 다행히 그 남자는 나를 쫓아 내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에 난 작은 창으로 그 사람이 여전히 복도에 있는지, 방으로 돌아갔는지 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않았다 무서워서 손과 다리가 덜덜 떨렸고 안절부절 초조하게 서있었다. 얼마 후 룸메이트가 돌아오고 나서야 온 힘이 풀려 침대에 털썩 앉았다.


볼로냐는 아름답지만 성희롱의 기억은 아름답지 않다.

점심에는 볼로냐에서 이십년동안 산 한국인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아침에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이런 일이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경찰에 신고하도고 남을 일이라고 놀란 나를 위로했다. 유럽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이탈리아어도 못하는, 키가 작은, 동양인, 여자라 당한 일 같아서 화가 났다. 만약 그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여자가 내가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이거나 유럽 사람이었다면 그 남자가 똑같이 자기 방에 함께 가자고 말했을까?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길에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아탄다. 우리나라처럼 특별히 택시처럼 보이는 차가 아니어도 택시 영업을 한다. 알마티에서 이슬람 사원을 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대중교통이 녹록지 않아 택시를 잡았다. 빨간 마티즈가 손을 흔드는 나를 보며 차을 세웠다. 뒷좌석에는 다른 여자가 짐과 함께 앉아있었는데 나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앞좌석에 앉아야만 했다. 조금 가다가 뒷좌석 여자가 내렸고 나는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더 앉아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자가 내린 후 내가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겨타야했는데 그때는 미처 그 생각까지 하지 못했다. 둘만 남게 된 빨간 마티즈 안에서 택시기사는 나에게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귀엽다는 말을 연신했다.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는 나에게 키스해도 되는지를 물어봤다. 단호하게 싫다고 했고 그는 그냥 인사일 뿐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인사가 없을뿐더러 한국 사람에게 그렇게 인사하는 것은 굉장히 실례라고 되받아쳤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왜 안되냐고, 왜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냐고 계속 물었다. 혹시 나쁜 마음을 품은 기사가 이곳 지리도 잘 모르는 낯선 여행자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지, 목적지가 아니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지는 않을지, 두렵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난 그 이후로 카자흐스탄에서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다리가 아파도 걸어 다녔다.


여행을 처음 다니기 시작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캄보디아의 어느 박물관에서 앉아서 쉬고 있을 때 다른 여행자가 내가 앉은 벤치로 와 함께 앉았다. 스페인에서 왔다고 소개한 그와 짧은 대화를 했다. 그는 헤어지는 인사를 스페인식으로 볼키스로 하자고 했다. 물론 거절했지만 여행 초짜라 내가 오버해서 문화의 차이를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다. 헤어지면서 나에게 대뜸 자신의 숙소 주소와 방 번호를 남긴 쪽지를 주고 가자 이 상황이 파악되었다.

음, 더 많은 사례를 쓸 수 있지만 여기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혼자 여행을 하는 여자라면 누구나 성희롱과 캣콜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영화 <와일드>는 4,300km나 되는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홀로 트래킹 하는 여자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코스를 완주하려면 6개월 정도가 소요되는데 위험하고 고되지만 절경이 아름답고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곳이라 많은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로 꼽히기도 하는 곳이다. 영화 <와일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꿈꾸지만 나는 아니다. 주인공 셰릴이 문득문득 처하는 성폭력의 공포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영화를 보는 내내 무서웠다. 추위도 절벽도 무거운 배낭도 아닌 낯선 누군가에게 당할지도 모르는 성폭력의 위협이 나에게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무전여행으로 세계를 누비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정해진 숙박지도 없이 때에 따라 현지인을 만나 숙소를 제공받거나 텐트를 치고 자는 일이라니. 멋진 모험이다. 모험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는 법. 남성들 역시 위험을 감수하고 하는 여행이지만 여성의 경우는 위험의 수위가 다르다. 강도를 만나 있는 돈 다 빼앗기는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나는 절대 그런 도전을 감행할 수 없다.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동행이 있다면 모를까 아시아인 여성 혼자 그런 방식으로 여행을 하려면 굉장한 운이 따라줘야 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지만 나쁜 사람이 나를 피해 갈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미 내가 겪은 수많은 성희롱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나의 완벽하지 않은 발음과 작은 눈과 키가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될 때, 모든 아시아인이 중국에서 온 줄 알고 ‘니하오’라고 말하며 낄낄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을 때.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이 차오를 때가 여행에서는 종종 있다. 그러나 아시아인에다가 여성이라면 그 수위는 한층 높아진다. 아시아인 여성에게는,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는 여성들이나 서양인 여성에게는 하지 못하는 노골적인 발언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 그들 스스로 법으로 정해놓고 금지시켜놓은 행동들이 아시아인 여성에게는 예외다. 그들은 부끄러움의 자리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차별을 즐긴다. 참을 수 없는 이런 불편과 분노를 같은 여성인 서양 여성들에게 털어놓아도 의외로 잘 공감하지 못한다. 이런 경험을 그들은 나처럼 자주 겪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아인이면서 여성인 여행자는 언제나 약자다.


독일 어느 소도시에서 여행하던 일행이 담배를 피우던 와중에 두 명의 독일인 남자가 웃으면서 다가왔다고 한다. 독일어로 뭐라고 말했는데 알아듣지 못하니 영어로 섹시, 섹스라는 단어를 말했다고. 분노가 치밀어 숙소로 돌아온 그녀에게 말했다.

“뻐큐라도 날려주지 그랬어”

오초 정도 생각하다가 곧 취소했다.

“생각해보니 그냥 무시하고 돌아온 게 잘한 것 같아. 뻐큐 날렸다가 열 받아서 폭력적으로 변하면 어떻게 해”


내가 겪은 상황들이 물리적인 폭력 상황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어서도, 내가 대처를 잘해서도 아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시아인 여성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아시아인 여성 누군가는 지금도 조롱과 위협의 대상이 되고 있을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현명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정해진 답은 없다. 어떻게 대처하든 내가 안전한 방법이 제일 중요하다. 나는 상황에 따라 그런 성희롱의 말을 무시하기도 하고 면전에 대고 ‘부끄러운 줄 알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도에서 어떤 남자가 나와 함께 여행하는 일행에게 성추행을 하려고 할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애초부터 아예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지 않기, 혼자 너무 취하지 않기 등등. 안전은 백번 천번 강조해도 모자라다. 눈치껏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여행을 포기하기엔 아직 용기가 남아있다.

모든 여성이 위협 없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을 꿈꾸려면 일단 내가 살고 있는 사회 먼저 안전할 수 있도록 마음 써야겠다. (나의 일상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은 것 같지만) 내가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결의 공포나 위협을 한국에 사는 다른 외국인 여성들은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내가 바라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좀 더 다른 감수성을 갖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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