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자연주의 문화
에덴동산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베를린의 동독박물관(DDR Museum)에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슈타지의 고문실도 영화에서나 봄직한 동독의 빈티지 유물도 아니었다. 누드비치.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상관없이 모두 옷을 벗고 해수욕을 즐기는 오래된 사진과 영상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치발리볼을 하거나 태닝을 하거나 가족들과 이야기 나누며 가져온 음식을 먹거나 그들은 모두 ‘맨몸’이었다. 누드 비치하면 떠오르는 도저히 용기 낼 수 없는 문란함 따위가 아니었다. 자연스러웠고 자유로워 보였다. 맨몸, 그것도 여성의 맨몸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고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에서 자란 나에게 누드비치는 충격이었다. 그것도 사회주의 국가, 동독의 누드 비치라니. 그동안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왔는지에 대한 반성과 함께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모두가 옷을 벗고 해수욕을 하던 저 사회에서는 여성의 몸이 평가나 소비의 대상은 아니었겠지? 만약 그런 사회였다면 저 나이 든 여자와 저 뚱뚱한 여자가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르거나 뚱뚱하거나 엉덩이와 가슴이 쳐지거나 나이가 들거나 젊거나, 그런 것은 상관없이 그냥 몸들이었다. 문득 한국에 두고 온 다이어트 보조제가 떠올랐다. 내가 자라온 사회에서는 무엇이 그토록 맨몸을, 여성의 맨몸을 억압하게 했던 것일까. 멋져 보였다. 나도 저 안에서 한 사람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으로 해수욕을 즐기고 싶어졌다.
독일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어찌할 수 없는 피곤이 몰려왔다. 독일의 추위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이 지역에 물이 좋은 사우나가 있으니 몸 좀 풀고 오라고 알려주었다. 핀란드를 여행하며 사우나의 광팬이 된 나는 그곳에서 뜨끈하게 몸도 마음도 풀고 오리라 다짐했다. 뒤이어 나오는 말, “그런데 누드 사우나예요.” 헉.
옷을 입지 않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예절이라니. 다른 사람의 맨몸을 마주하는 것도 낯 뜨거워지는 일이지만 내 몸을 드러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볼품없는 내 몸매와 배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점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동독 박물관에서 봤던 전시대로라면 나 역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인간들 중 한명일뿐이다. 그 탐나는 감각을 나도 느껴보고 싶었다.
소심한 나의 심장은 사우나에 가기 전까지 요동쳤다. 두 가지의 큰 고민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나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속으로, 심지어 남녀구분 없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독일 사람들이 그들과 눈에 띄게 다른 아시아인 여성인 나를 너무 빤히 쳐다보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여행하며 겪었던 모든 종류의 차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 어쩌면 더 당당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왠지 알몸을 드러내고 나면 모든 차별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몸이 이렇고 나는 이런 사람인데, 뭐? 어쩔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두 번째 고민은 나의 시선이었다. 나 역시 타인의 몸을 평가하는 사람은 아닌지 스스로 검열이 필요했다. 나는 타인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 사람인가? 그냥 몸 자체로 인정하는가? 소비사회의 잣대로 아름다운 몸과 추한 몸으로 나누어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질문들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서야 사우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우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었다. 샤워실만 남녀 구분이 되어있고 나머지 모든 공간, 탈의실, 수영장, 사우나와 숲은 함께 공유한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을 때에 내 두 칸 옆 락커를 이용하는 사람은 젊은 독일 남성이었다. 돌아다닐 때는 수건이나 가운을 걸쳐도 되지만 사우나 안에서는 깔고 앉는 매트를 제외하곤 위생상 어떤 것도 안된다. 실내에는 온도를 달리하는 습식 사우나가 여러 개 있었고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수영장이 있다. 누드 사우나의 부지는 전부 키가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숲 안에 사우나가 있는 셈이다. 밖으로 나와서 깊지도 넓지도 않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맨 몸으로 물 위에 누워있으니 온 하늘이 내게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숲이 주는 맑은 공기도 아무런 여과도 거치지 않고 내 몸으로 들어왔다.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내가 수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러 사람이 수영장 옆을 알몸으로 지나갔다.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구릿빛 피부의 아시아인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걸어 나가면 핀란드식 사우나가 여러 채 있다. 걸치고 온 수건이나 가운은 밖에 벗어서 걸어두고 사우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우나를 즐기는 동안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앞에는 호수가 있어서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았다. 호기로운 사람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젊은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남녀 구분 없이 이 공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아무도 서로의 몸을 쳐다보지 않는다. 벗은 몸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서로의 몸을 비교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알몸으로 썬베드에 누워 책을 읽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며 일행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맨 몸으로 사우나 곳곳을 돌아다니면 산책할 수도 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과 사우나를 즐긴다, 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을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생각보다 이런 일들이 너무 간단해서 용기가 미친 듯이 타올랐다.
1900년대부터 확산된 독일의 나체 문화는 자연주의 운동을 기반으로 한다. 인간의 몸을 성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평등을 지향하며 편견으로부터의 탈피를 추구한다. 자연주의자들은 말한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가장 건강한 것이라고. 독일이 분단된 후 동독에서는 이런 나체 문화를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오히려 더 광범위하게 퍼졌다. 성적 해방과 더불어 획일화된 문화와 금지된 모든 것에 저항하는 운동으로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내가 느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그들이 추구하는 문화를 제대로 향유했던 것이다.
독일 여행을 하면서 날씬하지 못한 내 몸을 원망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유럽여행에서 인생 사진으로 건질만한 사진을 몇 장이나 찍고 가던데 나는 똑같은 포즈로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짧고 통통해 영 볼품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으면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한국에 가면 오키로 쯤 빼야지 마음먹고 서러워했다. 누드 사우나에 다녀오고 난 후 살 빼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아버렸다. 그 대신 이런 멋진 일들을 오래오래 즐길 수 있도록 좀 더 건강해지기로 했다. 여행 오기 전 한국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몸무게를 쟀는데 돌아와서 그만뒀다. 마지막으로 몸무게를 잰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몸은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그냥 몸이다. 한국에도 이런 사우나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 특히 여성의 몸을 평가하는 말들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서 나체 문화가 건강하게 펼쳐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도 불법 공유 사이트에는 몰래 찍은 여성들의 몸이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있겠지. 나의 이런 경험조차도 ‘자연주의’라는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나의 경험도, 누군가의 몸도 그저 호기심 대상으로만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몸을 그냥 몸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때가 오면 우리 사회가 차별과 편견과 소비지상주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날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