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대신 우정
대학을 갓 졸업하고 네팔 여행을 하는 청소년 그룹에 보조교사로 참가한 적이 있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에서 이삼십 분쯤 걸으면 보육원이 있는데 여행 일정 중에 그 보육원에 방문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라 보육원 강당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도록 꾸미는 일이 우리의 일정이었다.
보육원으로 쓰이는 3층 건물은 아직 덜 지어진 것 처럼 보였다. 벽돌이 올라가다 말아서 지붕의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방 안은 밝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지만 정전이 잦은 네팔의 사정 탓인지 어두웠다. 방마다 2층 침대 두어 개가 있었다. 건물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자 보육원의 아이들이 문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우리를 쳐다봤다.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는 모습이었지만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니 우리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했던 모양이었다. 어색함도 잠시, 네팔라면을 함께 끓여 먹고 나니 장난을 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밥 한 끼의 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에 신나게 뛰어놀았다. 키가 큰 한국 아이들은 키가 작은 네팔의 어린아이들을 무등 태워주며 제법 형님티를 냈다. 대여섯 살 난 아이부터 고등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청소년까지 다양한 나이대가 존재했지만 술래잡기를 할 때만큼은 나이 따윈 모두 버리고 꺅꺅 소리 지르며 뛰어놀았다. 색종이와 준비한 재료로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어 강당 벽에 붙이기도 했지만 서로 장난치고 노는 시간이 더 길었다. 헤어질 즈음에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편지를 주고받는 아이들도 있었다. 즐거웠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부대꼈다.
돌아와서 하루를 닫는 모임을 할 때 오늘의 소감을 각자 나누었다. 모두 즐거웠다고 말했다. 한번 무등을 태워주고 나니 계속 무등을 태워달라고 해서 힘들었다고 투정 부리는 학생도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고 말했다. 말이 안 통해도 친구가 될 수 있어서 놀라웠다고. 멀리 네팔에 친구가 생겨 좋다고도 했다.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뛰놀았던 나도 즐거웠다. 우리는 오늘 있었던 에피소드를 공유하며 서로 웃었다. 갑자기 인솔교사가 분위기를 깨며 진지하게 말문을 뗐다. 너희들은 정말 그 정도밖에 느끼지 못하냐고. 학생들도 나도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교사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참 많아.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도 있는데 너희들은 어때? 부모님 잘 만나서 사랑받고 이렇게 여행도 다니잖아. 부모님에게 감사하다는 생각도 해야지. 너희들은 행복한 거야. 그걸 알아야 돼.”
다시 아이들이 말할 차례가 돌아오자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집에 계신 부모님께 감사해요.”
“부모 없이 사는 아이들도 있는데 앞으로 불평불만하지 않으려고요.”
“한국에 태어나서 이렇게 살 수 있어서 행복해요.”
고작 보조교사인 나는 들고 있던 수첩 귀퉁이에 낙서하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일순간 네팔 아이들이 한국에 사는 우리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까지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신나게 놀던 네팔 아이들과 우리 사이에 간극이 생겨버렸다. 네팔 아이들이 지금 우리의 대화를 듣는다면 무슨 말을 할까?
돌이켜보니 우리는 행복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경쟁 일색인 한국사회에서는 꼭 누구보다 더 잘하거나, 더 잘 살아야만 행복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장벽 없이 신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행복이 아니라면 도대체 행복은 무엇일까. 다짐했다. 누군가의 일상을 맘대로 재단하고 나의 일상과 비교하며 자족하지 않겠다고.
그 후에도 몇 개의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우리가 갔던 한 무료급식소는 네팔의 거대한 슬럼가에 지어진 곳이었다. 한국 단체가 지은 이 곳은 한국인들이 봉사활동을 위해 방문하는 단골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슬럼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료 점심을 제공한다. 여기 오는 봉사자들이 그렇듯 우리도 똑같은 일을 했다. 배식과 설거지. 우리의 모습을 급식소 관계자가 와서 사진을 찍었다. 배식을 하는 우리에게도, 배식을 받는 아이들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이런 사진 찍기가 마치 이곳의 관행인 것 같았다. 설거지와 청소까지 마친 후 우리는 슬럼가를 걸었다. 여러 번 빈곤의 풍경을 목격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판자나 나무, 비닐이나 헤진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 수천채였다. 전기나 상하수도 시설은 물론 제대로 된 취사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길게 난 길을 따라 낸 도랑에는 구정물이 고여있었다. 쓰레기도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슬럼가를 지나며 모두 침묵했다. 아마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들의 빈곤을 관음했다. 그들의 살림살이가 궁금해 천막 안을 슬며시 들여다봤고 사진도 몇 장 찍어댔다. 문득 궁금해졌다. 매일같이 이 지역에 봉사 오는 한국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영양결핍과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이 급식소는 이 슬럼가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이 급식소를 처음 만든 사람은 분명 선의로 시작한 일이었을 것이다. 봉사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사람도 누군가를 돕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왔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왔지만 이내 깨달았다. 나는 나의 ‘선의’를 섬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나의 마음만 있었지 그 너머에 있는 상대의 마음은 내 안에 없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 졌다. 카메라도 가방에 집어 넣었다. 호기심과 연민 어린 시선을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부유한 나라에서 온 외부인에게 생활기반을 그대로 노출하고 싶을까? 이들이 마음의 생채기 없이 그저 선의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네팔뿐만 아니라 인접한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빈곤국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비슷하다. 빈곤에 처하게 된 사회문화적 원인과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경제적 상황은 외면한 채 개인의 빈곤한 일상을 바라보며 동정한다. 그 시선 중에는 빈곤을 개인의 탓으로 몰아가는 무지도 있다. 학교를 지을 수 있는 기금을 모으고 급식 봉사를 하러 오지만 빈곤의 근본 원인에 저항하거나 그들을 지지하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들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좋은 곳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혹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 기뻤다고.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것이 불평등의 원인을 인식하고 함께 어깨 겯는 것보다 쉽기 때문일까. 이대로라면 우리가 행복하다는 걸 알기 위해서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불행한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는 것만 같다.
우정의 마음으로 현지인을 만나는 것은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다른 세계의 누군가와 대화하며 그들의 일상 속의 행복에 함께 기뻐하고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왜 없을까. 우리는 왜 우리의 기준과 편협한 생각으로 타인과 그들의 삶 전체를 맘대로 평가해버리는 걸까. 어쩌면 진짜 동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일지도 모른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 우정의 마음자리에 동정을 가져다 놓는 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