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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여행하는 새로운 방법

일본 여행으로 마주하는 일본

by 다다

8월 15일은 우리에겐 해방의 날이지만 일본에겐 패전의 날이다. 전쟁을 애써 왜곡하고 미화하려 애쓰는 일본은 8월 15일을 우리와 다르게 보낸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A급 전범이 안장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은 8월 15일에 치러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눈치 때문에 일본 총리가 신사 참배를 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일본 우익의 결집이 필요할 때면 언제고 자유롭게 참배하고 공물도 보낸다. 지금의 일본우익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심장을 가졌다.


처음 도쿄에 갔을 때 야스쿠니 신사에 갔다. 거대한 도리이가 신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조금 더 가니 일본 육군의 창설자이자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의 동상이 위엄 어린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신사 앞에서는 40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일본인들이 천막을 쳐놓고 서명을 받고 있었다. 일본어가 능숙한 동행인을 통해 물어봤다. 그들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대외적으로 계속 문제가 되니 전범을 다른 곳으로 모시자는 몇몇 정치적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서명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을 다만 명예롭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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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에는 현지인도 외국인 여행자도 많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전범의 위패가 모셔진 앞에서 일본식으로 절하며 소원을 빌고 있었다. 소원을 빌기 위해 동전을 꽉 쥐고 기다리고 있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뒤로한 채 우슈칸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슈칸은 야스쿠니 신사 옆에 위치한 군사박물관이다. 이곳에서 나는 일본이 기록하는, 기억하고 싶어 하는 역사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은 그들의 식민지배 역사를 교묘히 감추는데 능숙하지만 여기에서는 아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드러내놓고 미화하며 찬양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그 자세한 설명에 분노했다. 찬찬히 둘러보던 외국 관광객들은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일본의 역사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감사의 인사. 분노에 찬 메시지도 종종 보였지만 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외국인 여행자들이 남긴 메시지가 대부분이라 한숨이 나왔다. 유럽인들은 독일이 일으켰던 세계대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들여 공부하지만 일본이 일으켰던 같은 전쟁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비껴서 있을까.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시기를 함께 보냈으면서도 독일과 일본에 대해 다른 반응을 갖고 있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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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야스쿠니 신사와 우슈칸은 너무 끔찍한 곳이었다. 전쟁에 쓰였던 잔혹한 무기들을 전시하고 귀여운 아기 인형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옷을 입혀 팔던 곳. 전쟁에 대한 왜곡과 미화가 넘쳐흐르던 곳. 나는 그곳에서 일본 우익이 꿈꾸는 일본의 미래를 보았다.


그로부터 십 년도 더 지난여름, 다시 도쿄를 방문했다. 관광지는 영 흥미가 없어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다 작은 박물관에 가게 되었다. WAM(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이 그곳이다. 일본인에게는 물론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찾아가기 어려웠지만 헤매며 당도할 수 있었다.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이라는 이름의 WAM은 와세다대학 안에 있다. 학부가 밀집한 곳과 떨어져 있어서 학생들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은 전 세계 일본군‘위안부’들에 관한 기록을 모아놓은 아주 작은 전시관이다. 내가 방문했던 날에는 전시교체 작업 중이라 안을 둘러보지 못했지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WAM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처럼 전해지던 일본군‘위안부’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시작되면서부터다. 그 이후로 전 세계의 여성들이 자기의 상처를 드러냈다. WAM입구에는 이 증언자들의 사진과 함께 짧은 이야기가 씌여진 안내문이 있었다. 바닥에 앉아 할머니들의 얼굴을 보고 이름 하나하나를 읽었다. 할머니들의 사진과 이름이 붙여진 패널은 여기 용감한 여성들을 보고 기억하라고, 나에게 또한 증언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일본의 우경화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우익단체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지지 않고 평화의 목소리를 내는 이런 작은 공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할까. 10년 넘게 애쓰는 이들의 마음이 새삼 귀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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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일본 여행을 왔을 때가 생각났다.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로 둔갑했던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서 크게 실망하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분노했었다. 그러나 WAM과 같은 몇 개의 작은 박물관 덕분에 일본 여행의 기억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평화박물관은 제국주의 일본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하기 위해 애쓰는 곳이었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오류를 꼼꼼히 잡아내며 한국과 중국의 역사교과를 비교해놓은 전시는 일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박물관은 제국주의 시대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오사카의 피스 오사카와 인권박물관도 흥미로운 곳이었다. 피스 오사카는 시민단체의 주도로 세워진 곳이다. 오사카성과 가까운 곳에 있어 접근도 쉽다. 이곳에서는 세계 2차 대전 동안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일본 국민은 전쟁의 폭력과 참상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가해국의 국민이기도 하다. 이 두 시선을 모두 따라가다 보면 전쟁이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중국과 한국이 그 시기에 겪었던 역사에 대해서도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만난 안중근 의사 사진이 반가웠던 이유는 그들도 안중근 의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권박물관(리버티 오사카)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인권과 관련한 주제로 차별을 받는 여러 집단을 다루고 있었는데 재일조선인도 이 박물관이 다루는 내용 중 하나이다. 재일조선인을 일본 사회가 어떻게 배제해왔는지에 대한 전시와 함께 재일조선인의 일상과 문화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었다. 재일조선인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곳이라 의미가 남달랐지만 재일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자의 모습도 함께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가 갔을 때에는 부모와 함께 방문한 어린이들이 많았다. 어린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전시라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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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사에서 오사카 정부와 우익단체의 영향으로 인권박물관이 폐관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피스 오사카는 전시 내용이 대폭 바뀌어 지금은 전쟁 피해자 일본의 모습을 더 부각하고 있다고 한다. 소수의 시민들이 이 두 박물관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척박한 일본 땅에서 이들의 노력이 얼마나 힘겨울지 가늠이 되었다. 멀리서나마 이런 작은 박물관과 평화의 바람을 지켜나가고자 애쓰는 일본 시민들에게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지금 한국에서는 어느 때보다 강한 일본 보이콧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우경화된 일본 정부와 평화를 거부하는 우익 집단과 기업이지 일본인 개개인은 아니다. 정치와 외교로도 해결되지 않는 이 오래된 문제의 해법은 어쩌면 한국과 일본, 양국의 시민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평화를 외치는 일본 시민들이 더욱 목소리를 내고 결집해 일본 사회 안에서 균열을 낼 수 있도록 연대하는 것이 이웃인 한국 시민의 역할이 아닐까. 이런 생소한 공간을 꾸준히 방문하고 일본의 시민들을 만나는 것이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지금의 일본 보이콧 운동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지만, 혹시 한국인들이 다시 주저 없이 일본을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런 작은 박물관들도 그들의 여행 리스트에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의 역사인식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만 우리의 일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여행을 할 때에도 머물렀으면 한다.


일본이 우경화되면 될수록 희망이 보이지 않아 좌절하다가 내가 갔던 박물관들을 떠올린다. 일본 사회에서도 어떤 이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미래세대와 인류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뗄 수 없는 한일관계에서 지독하게 날을 세우기보단 그들과 어깨 겯어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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