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1. 여기에 살았다.
힙하다는 베를린의 하케셔 마켓을 걷고 있었다. 봄인데도 쌀쌀한 탓에 옷을 한껏 여미고 걸었다. 움츠러든 나의 걸음에 무언가가 채였다. 바닥을 보니 네모난 금색 조각이 박혀있었다. 안그래도 울퉁불퉁한 도로에 거추장스럽게 조각이라니. 자세히 보니 뭔가 써져있다. 함께 걷던 S에게 물었다.
“아, 이거 슈톨퍼슈타이넨이예요. 한국어로는 뭐라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네.”
금색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과 날짜가 적혀있는데 S는 이 이름의 주인공이 과거 이곳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살았던 Uri Davidsohn은 1943년에 태어났고 1943년에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슈톨퍼 슈타이넨, 한국어로 ‘걸림돌’인 이 조각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길을 걷다 우연히 태어나자마자 아우슈비츠로 향해야 했던 아이의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그 옆과 위에도 걸림돌이 더 있었는데 같은 성을 쓰는 다른 이의 이름이었다. 그들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가족이었을까? 불행했던 가족의 서사를 그려보았다. 그냥 산책하는 것뿐인데 광기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던 사람들이 내 속으로 훅 들어왔다. 과거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던 그 길을 걸으며 나는 몇 개의 걸림돌을 더 마주했고, 그들의 이름을 모두 읽고 마음에 담았다. 문득 이런 조각을 매일같이 마주쳐야 하는 S나 베를린 시민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걸림돌(Stolpersteine)은 베를린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1200개가 넘는 도시에 설치되어있다.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 설치된 홀로코스트 기념물인 셈이다. 1992년, 독일의 쾰른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나치의 행적을 기억하기 위한 프로젝트에서 나치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점차 확장되었다. 현재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민간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걸림돌 하나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금액인 120유로는 지역사회의 시민들의 모금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걸림돌이 설치되는 곳은 나치 피해자가 살았던 집이나 직장 앞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걸림돌을 설치하는 데에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 이 걸림돌을 설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치된 걸림돌은 70,000개가 넘는다. 손으로 제작된 이 돌은 ‘여기에 살았다.’ 혹은 ‘여기에서 일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희생자의 이름 밑에는 태어난 해와 언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적혀있다. 자살이나 망명도 있지만 대부분은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 희생자뿐만 아니라 신티나 로마 같은 소수민족, 장애인, 성소수자,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시민이나 비독일계 시민까지 모든 희생자를 기억한다.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 넣은 걸림돌을 사람들이 함부로 밟거나 훼손한다면 희생자의 존엄은 지켜질 수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무심코 걷다가 마주하는 걸림돌 하나에 많은 사람들이 나치의 희생자를 기억으로 소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로마, 장애인, 성소수자로 읽히는 것은 아니라 걸림돌에 새겨져 있는 이름 그 자체로 읽힌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인간의 서사가 중요하다. 일상들. 그야말로 촘촘한 개인의 이야기.
2. 기억의 도시, 베를린
베를린은 문자 그대로 기억의 도시다. 도시 곳곳에 전쟁과 분단의 흔적이 각인되어 있다. 슈톨퍼 슈타이넨을 만났던 것처럼 무심코 역사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베를린의 랜드마크 베를린 돔 앞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비석이 있다. 화려한 베를린 돔에 경도된 여행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비석은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그룹을 기리는 조각이다. 1942년, 베를린 돔 앞의 공원에서 나치 프로파간다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한 레지스탕스 그룹이 이 전시를 방화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30명이 넘는 청년들이 이 일에 참여했다. 그들은 대부분 잡혔고, 나치는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나치는 500명의 유대인을 잡아들였다. 그들은 곧 희생당했다. 이 일은 전쟁과 나치의 폭력에 저항하는 시도로 독일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부끄러움에 경종을 울리는 기념물도 있다. 훔볼트대학교 앞 베벨 광장의 기념물은 가까이 가지 않고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광장 바닥의 어느 즈음, 유리판 바닥 아래에는 빈 책장이 놓여있다. 1933년, 독일대학생총연합이 나치에 저항하거나 유대인들이 쓴 책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벌인다. 움츠러든 예술과 창작에 대한 열의는 사그라들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럽을 떠나야만 했다. 이 빈 책장은 지성의 광장에서 나치에 동조했던 그 역사를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 광장을 지나쳐야 하는 훔볼트 대학교의 학생들은 빈 책장을 보며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빈 책장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티어가르텐의 맞은편, 도심 한가운데 제각각 다른 높이로 서있는 콘크리트 기둥들이 서있다. 마치 돌로 짜인 관처럼 보인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이 기둥은 모두 2110개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이 기둥 사이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콘크리트의 크기에 압도당한다. 나의 위치가 어디 즈음인지 짐작할 수 없을 때에는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 두려움도 밀려온다. 베를린 사람들은 트램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매일같이 이 거대한 콘크리트 군상들을 마주해야 한다. 지하에는 쇼아 기념관이 있다. 엄숙한 분위기의 이 방문자센터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 유대인 차별 정책과 홀로코스트 피해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개인이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일기나 편지를 통해 들여다보는 그들의 일상에 내 감정이 어찌할 줄 모른다. 희생자의 사진 앞에서 마음속으로 묵념했다.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말을 마주했다.
"이것은 일어난 일이고, 또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증언해야 하는 핵심이다."
이 공간을 빠져나와 티어가르텐으로 가면 나치에 의해 희생된 성소수자를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독일 의회 의사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중간에는 신티와 로마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이 있다. 베를린 어디에서건 나치 역사를 기억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다.
3. 기억은 투쟁이다.
온 도시를 기억의 공간으로 가득 채워도 부족한 걸까. 베를린에는 스무 개가 넘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고 길을 걷다가도 역사와 마주치게 하는 장치들이 무수히 많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건물마다, 도로마다 안내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에 이 건물은 어떤 장소였는지, 이 도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베를린은 꼼꼼히 기록하고 기억했다. 베를린 곳곳을 여행하며 이 도시 자체가 도서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길에서 마주한 역사의 조각들을 촘촘히 맞추다 보면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광기를 흐릿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그 광기에 저항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민들은 배운다.
베를린을 여행하며 한국사회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독일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일본의 역사인식을 꼬집지만 나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를 떠올렸다. 우리 사회가 기억하는 역사는 어떤 것일까.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국가가 휘두르는 총칼 앞에 스러져 간 수많은 사람들과 아직도 진상 규명되지 못하고 쌓여있는 많은 일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런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세월호.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국가가 그 책임을 방조했던 것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온 국민이 세월호가 무기력하게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공유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겠다고 다짐했고 그 다짐은 아직도 유효하다. 반대편에는 다른 목소리가 있다. 아직 제대로 밝혀내지도 못했는데 그만하자고 말한다. 2018년, 안산의 기억저장소에 방문했을 때, 아파트 벽마다 걸어놓은 커다란 걸개를 잊지 못한다. 화랑유원지에 조성될 추모공원을 ‘세월호 납골당’이라 지칭하며 결사반대하던 주민들. 아마 그들은 산책길에, 슈퍼에 다녀오는 길에, 일터에 나가는 길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눈 한번 마주쳐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선거에 나온 정치인의 공약마저 노골적이었다. 화랑유원지를 살려달라고 외치는 정치인들은 세월호에 탔던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한 말은 왜 듣지 않았을까. 그들이 애써 잊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그들은 세월호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바닷속으로 사라져야 했던 304명을 위한 공간 단 1%를 내어줄 마음자리도 없는 걸까. 세월호에 대한 기억과 추모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멀어 보인다.
독일도 완벽하지 않다. 2000년, 독일 정부와 기업은 대규모의 펀드를 마련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징용되었던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기 설립되었다. 배상을 모두 마치고 현재는 역사연구와 징용 희생자의 커뮤니티 지원, 청소년과 청년층에 대한 교육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에서 만났던 활동가는 지금 독일이 처한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독일 시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역사로 나치 정권이 장악했던 시기가 아닌 분단과 통일을 꼽았다는 것. 현재를 살아가는 독일 시민들 역시 나치의 희생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독일 사람들이 과거의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을 스스럼없이 했다. 고난을 이겨냈던 희망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끄럽고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녀는 특히 청소년과 청년세대의 역사인식을 꼽으며 나치 정권 시대에 일어났던 일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인 다니엘 린데만은 한국사람들이 독일 역사를 부러워하지만 자신은 독일의 역사인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오래전부터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사과했지만 유럽 외에 살고 있는 희생자들에게는 아직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동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 강제징용자에게 사과한 것도 2000년대 들어선 후다. 늦은 사과인 셈이다. 전쟁 후 경제교류를 맺어야 했던 유럽의 주변 국가에게 빠르게 사과한 것과는 다르게 그렇지 않은 국가에게는 사과가 늦거나 제대로 된 역사청산을 아직도 하지도 못했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의 의무는 막중하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독일의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에 기금을 조성한 바이엘이나 BMW 같은 전범 기업은 금전적 책임은 다했지만 별다른 사과를 하지 않았다. 전범기업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강한 사회적 합의의 틀 속에 금전적 책임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독일의 사례를 통해 역사를 어떻게 청산하고 기억해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최근 기세를 부리는 우익의 바람 속에서도 독일이 저질렀던 악행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시민들이 많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기억과 추모를 일상 속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슈톨퍼 슈타이넨도 그중 하나다. 우리 사회도 일상 속에서 기억과 추모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매일같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무심코 역사를 소환해 낼 수 있는 장치들이 곳곳에 있으면 좋겠다. 이유는 하나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기에. 상투적이지만 이보다 중요한 이유가 또 있을까. 미래에 이 땅에 사는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어느 누구도 국가에 의한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싸워야 한다. 기억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