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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즈존 말고 웰컴키즈존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by 다다

여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남해로 떠났다. 다섯 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또 40분 정도 읍면순환버스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마을에서 삼 일간 묵었다.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겸하는 그 공간은 늘 고요했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 역시 침묵을 지키며 고요한 시간을 맘껏 만끽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조식으로 계란과 빵, 바나나와 우유 등을 제공하는데 아침마다 거실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어서 게스트가 알아서 챙겨 먹으면 된다. 마지막 날 아침, 거실이 소란스러웠다. 노랫소리가 방문을 넘어 들어왔고 그릇들이 부딪히고 쿵쾅 걷는 소리가 울렸다. 혹시라도 주인이 내가 내간 줄 알고 아침식사를 정리하는가 싶어서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문을 빼꼼 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있던 여행자였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던 그녀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번잡스럽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 여행자는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고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내가 아침식사를 위해 거실로 나가자 그녀도 방에서 나왔다. 잘 깎은 키위를 주며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별스럽지 않은 소란스러움으로 어찌할 줄 모르고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다. 문득, 이 공간의 고요함을 지키기 위해 나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해에는 여행자들이 좋아할 만한 카페와 서점, 가게들도 많았는데 하나같이 고요한 곳들이었다. 블로그나 SNS에서 꼭 가봐야 되는 곳으로 선정된 그곳들은 노키즈존으로 운영되는 곳도 많았다. ‘음’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먼 곳까지 온 여행자들이 아이들의 소란에 여행을 방해받는다면 나라도 싫을 것 같았다.


남해를 떠나는 날, 다랭이 마을을 마지막 볼거리로 잡았다. 버스를 타고 몇십 분 달려 다랭이 마을 입구에 내렸다. 어쩌다 보니 민박집이 붙어있는 곳이 아닌 한적한 곳에서부터 산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바다 쪽으로 내려가 갯바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내 고향의 바다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조금 쉬다가 핸드폰을 열었다. 우연히 읽게 된 글은 열두 살 화가 전이수가 쓴 <우태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일기였다. 동생 우태의 생일이라 우태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갔던 화가 가족이 그 식당이 노키즈존이라 쫓겨났던 이야기였다. 문밖을 나와 우태를 보니 눈물을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는 문장에서 나도 눈물이 날 뻔했다. 짧은 일기를 읽으며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과 어젯밤만 해도 노키즈존이 필요한 이유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우태에게 상처를 준 것이 나인 것 같아서 얼굴이 빨개졌다.


갯바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나와 어른들이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은 어떤 종류였을까. 나 역시 휴식으로 온 이 여행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마음이 여유롭지 않으니 소란을 견딜 인내심이 없었다. 어른들이 고요한 시간이 필요한 사회에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봤다. 빡빡한 일상과 도심의 소란으로 잃은 마음의 여유를 여행에서 찾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존재를 거부하면서 그런 시간을 향유하겠다는 것은 또 다른 차별 아닐까. 아이들은 어른들의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고 못 박는 것은 어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권력일 뿐이다. 아이에 대한 차별이 좀 더 세련되어졌다고 해야할까. 그 표면이 어떻든 차별은 차별이다.


어렸을 적 엄마와 아빠가 시공부하는 모임에 종종 따라 간 적이 있다. 그런 강좌가 어린아이에게 열려있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닫혀있지도 않았다. 어른들 사이에 앉아 시인이 하는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하루는 강의가 끝나고 질문하는 시간에 나에게 마이크가 넘어왔다. 사회자가 나의 소감을 물었던 것이다. 그 공간에 함께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쭈뼛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이크를 밀었다. 뒤풀이도 함께 갔다. 어른들은 나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었고 먹고 싶어 하는 음식도 주문해주었다. 종종 나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었고 혹시 어떤 말을 하게 되면 모두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어떤 시인에게는 삐뚤삐뚤한 글씨를 써넣은 나의 공책을 보여주었다. 내가 꿈에서 본 내용을 적은 글이었는데 그는 너무 좋아했다. 나중에 그의 신간이 나왔을 때 직접 사인한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나는 어른들이 세상과 예술을 논하는 어려운 자리에서도 환대받는 어린이였다. 그들은 어른들의 공간에서 어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대화했고 그 맥이 끊기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나의 존재를 이따금씩 생각해주었고 나의 방식으로 참여하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상과 예술을 논하면서 어린이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을 알았으리라. 돌이켜보면 어린이로서 꽤 괜찮은 나날들을 지냈다. 어떤 어른들은 과격한 방식으로 어린이를 대하거나 무시하기도 했지만 존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노키즈존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을까. 부모, 특히 엄마들의 양육방식을 문제로 꼽지만 나는 파편화된 개인의 일상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어른들에게 고도의 집중과 숙련된 노동을 원하지만 그뿐이다. 엄격하고 경쟁 일색인 노동현장의 스트레스는 개인이 풀어야 할 몫이 되어버렸다. 스스로마저 돌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물건을 구경하는 동안만이라도 조용하고 여유롭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 아이들은 모두 소란스럽다는 것도 편견이지만 아이들의 방식을 이해하기에 지친 어른들이 인내심마저 잃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안다. 어른들의 스트레스는 아이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조용하고 편안하기 위해 어린이의 입장을 막을 수는 없다. 그 입장을 막아야 하는 경우라면 안전에 관한 것뿐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다. 나의 편의를 위해 어린이들이 시끄럽다거나, 부모가 잘못된 양육방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차별을 정당화하지 말자. 반대로 생각해보자. 유럽여행에서 맛집으로 알려진 식당을 찾아갔는데 한국인이 시끄럽다거나 팁을 잘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게의 출입을 막았을 때, 그것을 온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간과 공간을 여유롭게 누리고 싶은 마음처럼 인간 사이의 마음에서도 여유로워져야 한다. 어른들은 아이와 부모에게 더 많은 공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고 부모는 아이가 공간에 맞게 행동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가게는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공간의 규칙을 알리고 따라줄 것을 요청하면 된다. 모두가 사람들이 서로의 방식을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그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지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린이’라는 약자를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잊지 말자.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c. jeon2soo 인스타그램


상단이미지 출처 :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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