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어를 못해도 괜찮아

여행자의 언어

by 다다

1. 힘센 언어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영국인이나 미국인처럼 영어권 국가의 여행자들이 엄청 부러워지는 순간이 온다.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전시관의 설명은 현지어와 영어로 되어있고 가이드 투어나 오디오 가이드도 영어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도 종종 끼어있지만 한국어는 거의 없다. 숙소나 교통, 관광지 입장안내처럼 기본적인 정보제공에서도 현지어나 영어를 하지 못하면 소외된다. 언어장벽을 마주할 때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영어를 ‘잘’하게 된 그들이 나는 부럽다.


언어는 권력이다. 여행에서 더욱 실감한다. 한국어보다는 일본어가, 일본어보다는 독일어나 스페인어, 프랑스어 같은 서구의 언어가, 그보다는 세계의 권력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의 영어가 더 많이 쓰인다. 국방력이나 경제적 우위에 따라 언어의 지위도 달라지는 셈이다. 방글라데시의 벵골어 사용자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지만 벵골어를 배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배워서 힘이 세질 수 있는 언어를 좋아한다. 영어처럼. 언어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영어를 생활어 수준으로 쓰는 사람을 가장 적게 잡았을 때 4억 7,000만 명 정도이고, 어느 정도 구사하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거의 18억 명에 가깝다고 한다.(문강형준) 전 세계의 인구가 60억이고 존재하는 언어가 대략 6,000여 개쯤 된다고 봤을 때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모국이 아닌 곳에서도 얼마나 많은 편의를 누리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어권 국가에 의한 억압과 식민지배의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경제나 정치에 대한 개입을 제외한다고 해도 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영어의 현재 지위는 그것 중 하나이다. 세계는 영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알아야 한다. 그들의 언어가 세계 어디서든 쉽게 통용되는 것이 어떤 바탕 위에 세워져 있는지. 모국어로만 여행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혜택이 아니다. 그래서 여행이 어렵거나 서툰 사람도 있다. 이런 사실을 그들이 이해하다면 소수언어를 쓰는 사람들과도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2. 언어로 차별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일본 유후인에서의 일이다. 긴린코 호수를 돌고 나니 다리가 아팠다. 구글맵으로 골목에 숨어있는 한적한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정원이 예쁜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젊은 한국인 엄마가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메뉴판을 받아서 죽 보더니 영어로 주문했다. 그녀의 주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인은 다짜고짜 일본어로 화를 내며 소리쳤다.


“여긴 일본이니까 일본어만 씁니다! 온리 재패니즈!”


당황한 그녀는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미안하다고 말했고 (물론 영어로) 주인은 메뉴판을 뺏듯이 가져가 버렸다. 지켜보던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 역시 영어로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오네가이 시마스 같은 단어를 썼기 때문일까, 주인의 불호령은 피해 갈 수 있었는데 나에게도 그렇게 화를 냈다면 여행의 기분을 완전히 망쳤을 것이다. 일본어를 못한다고 혼나는 엄마의 모습을 본 두 아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한국인 엄마도 영어가 서투른 탓에 예의를 차린 말투로 주문하지는 못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인의 처사가 너무했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은 일본을 여행할 수 없단 말인가. 여긴 일본이니까 코스타리카 원두로 내린 커피 말고 일본차만 팔라고 요구하는 여행자는 없다. 그의 태도는 분명 차별적이었고 혐오를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여행자였더라도 그가 똑같은 행동을 취했을지 의문이다.) 수많은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특히 한국 관광객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후인에서 일본어만 주장하는 불통을 마주하고 나니 씁쓸했다.


한국어는 주변 언어이다. 인구가 많은 탓에 세계에서 12번째로 많은 사용자수를 갖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남아나 우즈베키스탄, 네팔처럼 한국에서 이주노동 경험이 있는 현지인들이 많이 사는 나라에서는 그 지위가 조금 다르다. 여행자 거리나 유명한 관광지 근처에서 한국어로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주문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다. 한국 체류 경험이 있는 직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던 과거처럼, 코리안드림을 이루어줄 도구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즈베키스탄의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현지인 사장님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사장님은 안성에서 몇 개월 광주에서 몇 년을 일했다고 말하며 우리의 고향을 물었다. ‘아, 거기. 알아요’라고 말하는 사장님은 우리에게 서비스로 맛있는 빵도 주셨다. 즐거운 대화중에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들어왔고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장님의 능숙한 한국어 실력을 기특해했고 몇 마디 나누더니 난데없이 반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이를 깐 것도 아니고 왜 마음대로 반말인지. 그들은 한국어가 능숙한 현지인에게 반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상황이 불편해져서 주문한 음식만 먹고 나왔다. 이런 경험은 네팔이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종종 겪었다. 한국이 우즈베키스탄보다 더 잘 사는 나라라고 해서 한국인들이 더 어른이 되는 것도, 더 우월해지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수준이나 국방력으로 국가 간에 계급을 나눌 수는 없다. 이것도 차별이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있을 때, 단지 언어로 권력관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는 감수성이 여행자에게는 필요하다. 여행을 할 때에도, 여행 오는 사람을 맞이할 때에도, 혹은 다른 경우라도. 평등한 소통은 나의 마음자리도 세계도 넓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방법이다.




3. 영어를 못해도 괜찮아.


언어를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여행하고 싶은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여행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곳도 여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단한 인사말이나 단어만으로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나는 ‘맛있다’라는 단어를 여러 나라의 언어로 외우고 다닌다. 식당에서도 ‘맛있다’라는 단어를 쓰지만 현지인이 아는 말이 있냐고 물어보면 ‘맛있다’를 안다고 한다. 먹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또한 중요한 일이라 현지인들과 쉽게 공감대를 만들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여행하는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다른 표현이다. 단어 몇 마디 쓰려는 노력만으로도 여행은 더 즐거워진다.


내가 배웠던 언어 중 제일 재미있었던 말은 러시아어이다. 지금도 간단한 러시아어 인사말과 길 묻기, 가격 묻기, 맛있다는 말할 수 있다. 나는 러시아어가 내는 소리가 좋다. 입 안에서 말들이 오물오물 돌아다니는 것 같다. 베트남어는 가장 어려웠던 언어이다. 성조가 무려 6개나 있는데 단어를 알아도 이 성조를 제대로 소리 내지 못하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없다. 베트남에서는 노래를 만드는 일이 꽤 어려운 일이라고 누군가 그랬는데 성조에 따라 음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조가 6개나 있는 어려운 언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베트남 사람들은 어떤 뇌구조를 가졌을까? 어렵기 때문에 배우기를 포기한 대신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하나 외웠다. 말을 하는 대신 이 노래를 불렀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손뼉 치며 좋아하던 베트남 사람들도 따라 불렀다. 그들과 나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독일어와 이탈리어도 짧게 배웠다. 특히 이탈리아어는 영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많아서 대충 때려 맞힌 적도 많다. 영어는 가장 오랫동안 공부한 언어지만 잘 못하는 언어다. 제일 가성비가 떨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어는 제주어. 내 모어이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어를 종종 북한말 같다고 말한다. 전혀 동의하지 못했는데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만나면서 서울 사람들보다 내가 보다 더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여러모로 유용한 언어다.


내가 가장 잘하는 언어는 몸짓 언어. 바디랭귀지이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남쪽으로 2시간 남짓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에서 2박 3일 동안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 아주머니 혼자 사는 집에서 나와 일행이 함께 머물렀다. 우리는 베트남어를 할 줄 몰랐고 아주머니는 오로지 베트남어만 할 줄 아셨지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한 지 30분 만에 아주머니의 가계도 전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노트에 그림을 그려가며 손과 발, 몸을 총동원해 대화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해도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다. 소리 언어쯤은 친구가 되는 데에 큰 장벽이 못된다. 매일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아주머니는 베트남어로 물어봤고 우리는 한국어로 대답했다. 용케 말이 통했는데 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몸짓이었다. 베트남어와 한국어는 다만 소리에 불과했다. 하루는 일행과 어시장에 갔다가 아주머니와 함께 먹기 위해 생선과 새우를 사고 돌아왔다. 아주머니는 외출하고 집에 없었고 우리는 냉장고에 그것들을 넣어두고 나왔다. 산책하다가 마을회관에서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아주머니에게 냉장고에 새우와 생선을 넣었두었다고 말했다. 아주머니가 알겠다고 하면서 뭘 그렇게 까지 하냐고 말했다. 몸짓과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통역이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냐고 놀라워했다. 나도 모르게 으쓱해졌다.


몸짓 언어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언어를 달리하는 종족이나 부족끼리 소통하던 방법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잊어버렸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만약 언어 때문에 여행이 두렵다면 소리 언어 대신 몸짓으로 대화하는 훈련을 먼저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소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어도 몸짓 언어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나눌 수 있다.


600.jpg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주인공 월터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히말라야를 여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월터와 두 명의 포터는 월터가 목적지에 가기 전까지 동고동락을 하는데 이 장면들 속에서 소리 언어는 없다. 몸짓 언어만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게 여행자의 소통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언어가 달라도 서로 소통할 수 있다. 히말라야를 여행할 때에도 이러한데 우리의 여행에서는 더욱 분명하다. 언어의 장벽은 넘기 나름이다.

keyword
이전 02화여행자는 어떻게 동물을 만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