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전화 예매에 실패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현장 티켓을 구하기 위해서다.
무료 관람이 가능한 첫째 주 일요일이라 사람은 많고 취소표는 없는 것 아닐까 걱정했는데, 매표소에 도착해보니 아무도 없다. '여기가 맞나?' 열심히 검색을 해보고 있는 와중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8시가 지나자 직원이 나타났다.
오늘은 4명 정도만 현장에서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1등으로 줄 선 덕분에 가뿐히 손에 표를 거머쥐었다. 게다가 공짜라니. 표를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우리를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마, 한국인의 부지런함이 이런 거다 이 말이야.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한 덕분에, 관광객 없는 밀라노 대성당 앞에서 독사진도 마음껏 찍고, 계획에 없던 성당 내부와 성당 보물 전시 박물관 관람까지 했다. 밀라노 대성당은 외관이 워낙 화려해서 내부까지 볼 필요도 없겠다 싶었는데, 막상 또 안 보기는 아쉬웠달까. 압도적인 규모의 화려한 성당인 데다가 내부 역시 웅장했지만, 이미 수많은 성당을 봐온지라 처음 유럽 성당을 봤던 순간의 느낌을 또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잠시 쇼핑을 하다가 전날 사둔 고기로 점심을 해 먹으려고 에어비앤비 숙소에 돌아왔다. 최후의 만찬 관람까지는 시간이 넉넉히 남아있었다. (최후의 만찬은 지정된 시간에만 동시 입장하여 15분 동안만 관람할 수 있다.) 때마침 에어비앤비 호스트도 점심식사 준비 중이어서 시간이 약간 지체되긴 했으나, 덕분에 대화 좀 하면서 아직은 서먹한 사이를 조금이나마 좁혀 보았다.
문제는, 기차역에 도착해서는 기차 '지연시간'을 '플랫폼 번호'로 착각하고 잘못된 승강장에서 기차를 기다린 것이었다. 그렇게 눈앞에서 떠내 보낸 기차 이후로 뒤이어 오던 기차들이 줄줄이 지연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 손에 넣은 최후의 만찬 티켓이 눈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택시 타는 것은 영 못 미더워하는 엄마 때문에 최후의 만찬은 포기해야겠구나 체념하려는 순간, 천만다행으로 기차가 진입했다. 기차역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달려 간신히 시간 내에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에 도착했다.
그런데 세상에, 최후의 만찬이 그냥 그림이 아니라 벽화였다니. 나만 몰랐나? 아무래도 나만 몰랐던 것 같다. 최후의 만찬이 벽화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눈앞에 마주한 덕분인지,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봤을 때보다 훨씬 감흥이 컸다.
하루 종일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한 <최후의 만찬>
15분 동안 이 커다란 벽화를 두 눈에 꼭꼭 담아뒀다. 오늘 본 최후의 만찬이 내일의 최후의 만찬보다는 더 온전한 모습이겠지. 아마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작품이기도 하고.
햇빛은 강렬하지만 습하지 않아 기분 좋은 밀라노의 여름 날씨, 못 볼 뻔했으나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는 다시 못 볼 뻔했으나 결국 볼 수 있었던 <최후의 만찬>.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밀라노 여행이긴 했으나, 이탈리아 첫 여행에 성공적으로 발을 내디딘 오늘을 이탈리아식으로 기념하기 위해 나빌레오 운하로 향했다.
'이탈리아식 기념'이라 함은 이곳의 식전주 문화 '아페리티보(Aperitivo)'를 의미한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본격적인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칵테일 한 잔에 무한 안주를 즐길 수 있는 일종의 '해피아워'다.
위가 작은 우리 모녀는 물론 아페리티보 후에 또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페리티보에 저녁식사를 뜻하는 'cena'를 합친 '아페리체나(Apericena)'라는 신조어도 있다고 한다.
아페리티보보다는 아페리체나에 가까운 식사를 하기 위해 나빌레오 운하 양옆으로 줄지어선 음식점들을 둘러봤다. 정작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일식집이었지만, 여기에도 칵테일 한 잔에 스시와 캘리포니아롤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아페리티보 메뉴가 따로 있었다.
영어로 서툴게 주문을 받던 중국인 사장님은, 내가 중국어로 답하자 화색이 돌면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중국어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을 유럽에서 하게 될 줄이야.
중국식+일본식+이탈리아식 저녁식사
'이탈리아식 기념'이라기엔 중국식 일본식 다 짬뽕된 저녁 식사였지만, 40일간 유럽을 여행하며 했던 식사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비록 나빌리오 운하 야경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가득 채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저녁.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분 좋게 운하를 거닐며 밀라노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엄마와 싸우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