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야 안녕, 아마 마지막 인사일 거야.
베니스에서 기차를 타고 피렌체에 도착했다.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호텔은 놀랍게도 건물 3층에 위치해있었고 (0층부터 시작하니 4층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0층에서 3층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방 욕실에 문제가 생겼으니 근처의 다른 호텔로 옮겨야겠다는 기운 빠지는 얘기를 들었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좀 알려주면 덧나나.
다시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들고 내려오느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1성급에서 2성급 호텔로 한층 업그레이드 - 그리고 공용욕실에서 전용 욕실로 업그레이드 - 되어서 금세 기분이 풀렸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그동안 거의 에어비앤비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가, 오랜만에 엄마와 단둘이 쓰는 방, 그것도 단둘이 쓰는 욕실이 있는 방에 들어와 쉬니 이런 게 행복이지 싶다. 힘들게 번 돈 잘 쓰자고 온 해외여행인데, 뭣하러 제일 저렴한 교통수단, 제일 저렴한 숙소만 고집했을까. 돈 조금 더 쓰고 조금 더 편한 교통수단, 조금 더 안락한 숙소에 머물며 여행할걸- 하는 깨달음은 여행 끝자락에 가서야 얻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모든 여행지에서 미루고 미뤘던 명품 쇼핑을 위해 더몰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첫차를 타고 도착하니 아직 매장은 문을 열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구찌 매장 앞에 줄을 서있었다.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미리 봐 둔 물건이 있었는지, 꽤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고민도 없이 물건을 콕 집더니 바로 계산을 하더라. 살아생전 본 적 없는 놀라운 풍경이었다.
반면에 여태껏 백화점 명품 매장도 가본 적 없는 우리 모녀는 구찌 - 프라다 - 코치 매장을 두 번씩 들락날락한 후에야 구매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프라다 매장에서 엄마의 핸드백을, 코치 매장에서 언니의 샤첼백과 가장 친한 대학 친구들과 나 스스로에게 졸업 선물로 줄 카드지갑을 샀다. 명품 같은 거에 관심 없다던 엄마도 프라다 가방은 좋아하시더라. 관심 없던 게 아니라 관심 없는 척했던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던 나의 지갑 사정... 돈 많이 벌면 또 사드릴게, 엄마. 내 명품백은 사지도 않았음에도 한 달치 인턴 월급이 순식간에 빠져나갔지만, 어쩐지 마음만은 뿌듯하다. 이젠 우리 엄마도 모두가 다 아는 로고가 박힌 핸드백을 들고 다닐 것이다.
두오모 쿠폴라 예약시간에 맞춰 서둘러 다시 시내로 돌아왔는데, 입장하려고 줄을 서고 보니 사람들은 또 다른 바우처를 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4시 반으로 예약한 줄만 알았던 쿠폴라는 예약이 되어있지 않았다. 두오모 통합권을 구매한 가장 큰 이유가 쿠폴라였는데, 어찌나 속상하던지. 전날 조토의 종탑에 오른 것을 위안삼아 마음을 달래고, 저녁식사 장소로 예약해둔 티본스테이크 맛집에 갔다.
피렌체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티본스테이크보다도 별 기대 없이 주문한 랍스터 파스타가 훨씬 맛있었다. 랍스터는 쥐꼬리만큼 올라가 있었으나 엄마도 나도 처음 먹는 랍스터라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그래도 역시 랍스터보다는 파스타 그 자체가 맛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식사를 하다 보니 스테이크가 식어서 웨이터에게 남은 스테이크를 다시 데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한참 후에 받은 것은 테이크아웃용으로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나온 스테이크였다. 황당했지만 안 그래도 양이 많았으니 뭐, 하고 식당을 나왔다. 모처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여서 자릿세가 약간 아쉬웠을 뿐. 포장된 스테이크를 들고 하루를 낭만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랐다.
피렌체에 오기 전부터 이곳이 좋아졌으면 해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일부러 찾아봤었다. 그랬음에도 왠지 모르게 정이 가지 않는 도시였는데,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노을을 보니 이곳도 살짝 좋아진다. 뭔가 애매하게 둘러보고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도시, 그러나 다음에 또 오고 싶다는 마음은 딱히 생기지 않는 도시. 그래도 모처럼 2성급 호텔에서 지내고, 생전 처음 명품백도 사보고,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도 썰 수 있어 좋았던 피렌체야, 안녕.
아마 마지막 인사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