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도착한 첫날 가장 먼저 한 일은 보르게세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한숨 낮잠을 잔 것이었다. 그 후 핀쵸 언덕에서 본 로마 전경은 생각보다 별로였고, 로마는 생각 이상으로 많이 더러웠으며, 폼피 티라미수는 생각보다 맛있었고, 트레비 분수는 생각보다 컸다. 저녁에 천사의 성 앞에서 인생 최고의 버스킹 공연도 보았으나, 여전히 로마가 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인지는 의문이었다. 남들이 다 좋다는 파리에 일주일을 머무르면서도 결국 파리가 좋아지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엄마랑 파리와 로마 둘 중 어디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지에 대해 얘기해봤는데 결론은 둘 다 별로라는 것이었다. 물론 둘째 날의 바티칸 투어는 최고였다.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지창조 천장화를 감상하며, 나는 30초만 천장화를 올려다봐도 목이 뻐근한데 매일 16시간씩 3년 동안 이 작품을 그렸다는 미켈란젤로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보다는 역시 '위인'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어마어마한 인파 사이에서 시작했던 바티칸 투어를 끝마치고, 곧바로 숙소에 돌아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둘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셋째 날인 오늘은 로마 여행의 하이라이트 - 콜로세움에 가는 날이었고 그 시작은 좋지 못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할머니가 손수 만든 빵에 요플레에 과일까지 조식을 한가득 차려주셨는데, 점심에 먹을 빵까지 싸 달라고 하는 엄마한테 짜증을 내버린 것. 툴툴거리는 나를 두고 엄마는 내가 엄마를 무시한다며 눈물을 보였고,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들으면 가장 속상한 그 말을 또 들어버린 나는 또 울컥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거나 대들 때면 엄마는 내가 엄마를 무시한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난 나의 학교 성적이 별로였다면 엄마는 '무시한다' 대신 '싸가지없다'는 표현을 택했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엄마에게 버릇없이 구는 싸가지없는 자식이 되는 것이, 지 잘났다고 엄마를 무시하는 후레자식이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울컥해서는 내가 뭔데 감히 엄마를 무시하냐고, 왜 매번 나를 엄마를 무시하는 나쁜년 취급하냐고 화를 냈다가, 결국 먼저 엄마에게 툴툴거린 것을 사과했다. 어찌 됐든 엄마에게 그런 것으로다가 짜증을 내면 안 됐던 거다. 다툼 후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와 손을 잡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숙소를 나섰다.
듣던 대로 콜로세움에는 인파가 엄청났다. 줄이 짧다는 포로 로마노 쪽에서 표를 사려했으나 포로 로마노의 입장 줄마저 길게 늘어선 것을 보고 질려버린 우리는 외관만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던 약간의 아쉬움과 미련은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포로 로마노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순간 싹 사라졌다. 포로 로마노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다. 그냥 로마의 거리, 그 자체가 포로 로마노였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내려와 2천 년 전 과거와 21세기 현재가 공존하는 거리를 걷는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로마에 도착한 첫날에 이곳에 왔더라면, 단번에 로마와 사랑에 빠졌을 텐데. 그리고 어제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졌을 텐데. 너무 늦게 와서 너무 늦게 그 매력을 알아버렸다.
2천 년 전 과거와 21세기 현재가 공존하는 거리
친구의 추천으로 간 근처의 수제버거 가게도 선물 같았다. 버거 맛은 물론이거니와 너무나도 친절한 사장님까지. 친구가 추천해줘서 왔다니까 너무 고마워하면서 손수 초콜릿 무스까지 만들어주셨다. 게다가 그곳에서 마신 카푸치노는 단언컨대 내 생애 가장 부드럽고 가장 맛있는 커피였다. 로마가 좋아진 또 하나의 이유. 여행하는 중에는 기대치 않았던 완벽한 식사나 완벽한 커피 한 잔, 또는 뜻밖에 얻은 친절이 커다란 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소름이 돋았던,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아버린 사건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거리를 감탄하며 걷고 있던 내게 한 흑인 남성이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본인은 한국이 좋다며 하이파이브를 청하길래 응해줬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자기가 아프리카인이라는 이유로 말도 안 섞는데 고맙다며 나와 엄마의 팔에 팔찌를 채워주고 거북이 모양 장신구까지 쥐어주며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고작 하이파이브 하나로 감격스러워하는 그가 짠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아서 나도 고맙다며 선물을 받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프리카에 있는 자기 가족을 돕고 싶지 않냐며 돈 될만한 것을 달란다. 다행히 내가 맨 가방에는 현금이 들어있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신용카드밖에 없다고 가방까지 내보이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간 급변하는 그의 표정과 나의 가방을 샅샅이 보려 하는 집요함에 소름이 돋았다. 옆에서 상황을 눈치챈 엄마는 재빨리 모든 팔찌를 빼서 그의 가방에 도로 넣어뒀다. 나도 미안하다며 받았던 팔찌와 장신구를 돌려주려 하니, 그는 큰 것만 가져가겠다며 얇은 팔찌는 하나 남겨줬다. 고맙다던 말이 100%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덕분에 수제버거 가게에 이어 로마에서 또 하나의 선물 아닌 선물을 받게 되었다.
오늘 참 많은 선물을 안겨준 로마. 비록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시 로마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꼭 콜로세움 안에 들어가 봐야지. 누군가 "파리에서 살래, 로마에서 살래?"라고 다시 묻는다면, 아마 로마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