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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Sep 14. 2020

신혼여행지, 너로 정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삼시삼말피

로마의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짐을 맡아준 덕분에, 홀가분하게 시작한 남부 이탈리아 여행. 살레르노역에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와 따사로운 햇살까지, 이게 남부 이탈리아지. 아찔한 아말피 코스트를 종횡무진하는 SITA버스를 타고, 차멀미 없이 무사히 숙소가 있는 아트라니에 도착했다. 아말피나 포지타노보다 저렴한 가격에 머물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남부 이탈리아는 자유여행으로 가기는 어렵다기에 걱정이 많았는데 시작이 순조로웠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남긴 메시지를 따라 아트라니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호스트의 남자친구가 형과 함께 운영하는 카페로, 이곳에서 조식을 제공해준단다. 귀여워라! 숙소까지 안내해주기로 한 그를 따라 수많은 계단을 오르며, 로마 숙소에 짐을 두고 온 건 백번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옛날 사람들은 변변찮은 기계도 없이 어떻게 이 경사진 해안절벽을 따라 이렇게나 많은 계단을 쌓고 집까지 지었을까.




오늘은 이리도 날씨가 좋은데 내일은 비가 온다기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라면을 끓여먹고 음악의 도시, '라벨로'에 가기 위해 문을 나섰다. <비긴 어게인 3> 버스킹 장소기도 했던 바로 그 마을이다. 숙소에서 라벨로까지 1시간 트래킹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몇 걸음 걷고 풍경에 감탄하다가, 또 몇 걸음 걷고 사진을 수십 장 찍느라 1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빌라 침브로네나 빌라 루폴라에 굳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라벨로에서 내려다보는 아말피 코스트의 전경만으로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스위스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신혼여행은 무조건 이곳으로 오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도 내 신혼여행 따라 한번 더 와야겠다고 해서 식겁했지만.


레몬향으로 가득한 라벨로


이곳에서는 레몬으로 만든 술, '리몬첼로'가 유명하대서 선물용으로 몇 병을 구매했다. 난 남들 잘 챙겨주는 넉넉한 사람이 아닌데 유럽여행에 오고 나니 소중한 이들에게 이것도 사다 주고 싶고, 저것도 사다 주고 싶다. 그런데 정작 내건 안 사게 된다. 스스로에게만 쪼잔한 나.


라벨로에서 아트라니까지는 금방 내려왔지만, 역시나 계단이 엄청 많아서 정강이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나도 그런데 우리 엄마는 오죽하셨을까. 숙소 근처에 다 와서도 구글맵은 정확한 위치를 잡지 못해 한참 동안 숙소를 찾지 못하고 주변만 뺑뺑 돌았다. 화장실이 급해 숙소는 포기하고 급한 대로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했다는 식당에 들어갔으나, 주문한 해산물리조또는 영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이탈리아 정통 리조또는 원래 쌀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쌀을 덜 익혀주는 신박한 방식으로 인종차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던 엄마와 나. 하마터면 촌스럽게 밥이 덜 익었다고 컴플레인 걸뻔했다. 그럴 용기가 없는 소심쟁이라는 것이 다행이다. 식당 주인이 다가와 식사는 괜찮은지, 어디에서 묵는지 물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사진을 보여줬더니, "이 사람들 00네 집에서 묵는대!"라며 직원들에게 외치는 모습이 정겹기만 했다. 


식당에서 나오니 온 세상이 어두컴컴한데, 마을에서 새어 나온 불빛과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엔 별빛이, 밤바다 위로는 불빛이 수놓은 밤과 어우러진 파도소리가 참 낭만적이었다. 어느 나라에 가나 "추워, 추워"를 입에 달고 사는 엄마 때문에 그 낭만을 오래 즐기지는 못했지만. 신혼여행으로 꼭 다시 오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밤하늘엔 별빛이, 밤바다 위로는 불빛이 수놓은 밤




다음 날 아침, 일기예보가 틀리기만을 바랐건만 아침부터 비 내리는 소리에 좌절하며 잠에서 깼다. 호스트 남자친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느릿느릿 조식을 먹었지만, 빗줄기는 줄어들 줄을 모른다. 우비를 입고 아말피에 갔더니 다들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은 채 열심히 마을 구경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라벨로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물건들을 더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 유럽에서 7개국을 도는 동안에도 마음에 드는 포크를 발견하지 못한 엄마는 이곳에서 드디어 마음에 쏙 드는 포크를 발견했다. 어제까지는 단지 이곳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신혼여행으로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게에서 파는 화려한 도자기 식기들을 보니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생긴 것 같다. 그때는 차량 렌트까지 해서 무거운 식기류를 트렁크에 한가득 싣고 돌아가야지.


수산시장이라고 하기엔 작고 귀여운 가게에서 홍합을 3유로어치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은 홍합탕과 홍합리조또로, 저녁은 홍합라면으로 배를 채웠다. 그야말로 4천 원의 행복이다. 점심을 먹고 잠깐 비가 잦아든 틈을 타 다시 아말피에 가서 에메랄드빛 바다 구경을 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홍합라면을 끓여먹고는 다시 아말피 저녁 산책에 나섰다. 삼시세끼 마냥 삼시삼말피를 하니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날씨 탓에 포지타노나 스칼라 등 다른 마을에 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어제 같은 날씨였으면 천국 같은 이곳을 마구 누비고 다녔을 텐데, 스위스만큼이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이다.


덕분에 신혼여행으로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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