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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Oct 18. 2020

40일 여정의 종착지, 런던

라이온킹 뮤지컬이 있다면, 23시간만이라도

아말피를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맑은 하늘이 얄궂기만 하다. 아쉬운 마음에 아말피 해변에서 잠깐 노닥거리다가 시타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달리는 내내 우리의 바로 앞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식은땀을 흘리더니 구토까지 하고 난리가 아니었다. 아저씨 부부는 결국 황량한 도로 중간에서 내렸다. 어쩌면 아말피 코스트는 죽기 전에 달려봐야 할 도로가 아니라, 자칫했다간 죽을 수도 있는 도로라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평소에 차멀미를 잘하던 엄마가 여기에서는 괜찮으심에 감사하며 살레르노에 도착했다. 항구가 있고, 바닷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예쁜 도시였다. 이런 곳에 살면 마음이 맑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레르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왠지 맑은 마음을 가졌을 것 같다

살레르노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우리였지만, 그래도 로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대충 때울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는 언니가 추천해준 레스토랑에 갔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와인도 한 잔 해가며 여유롭게 저녁식사를 하는데, 우리는 식전주 한 잔과 함께 30분 만에 저녁식사를 마쳤다. 식욕을 이기는 수면욕 때문이다. 빨리 숙소로 되돌아가 짐 정리를 하고 침대에 눕고 싶었달까. 숙소로 돌아와 짐을 다 싸고 나니, 이제 정말 여행의 끝자락에 다다랐다는 게 실감 났다. 동시에, 아직 '런던에서 라이온킹 뮤지컬 보기'라는 어마어마한 일정이 남아있으니 한창 여행 중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로마를 떠나는 날 아침에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매일 손수 만든 빵과 함께 푸짐한 아침을 차려주시던 호스트 할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한다는 게 이런 걸까? 로마 공항에서 택스 리펀드라는 골치 아픈 과제만 잘 수행하고 나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뮤지컬을 볼 수 있을 거다.




다행히 중국 단체 관광객들보다 한발 빠르게 택스 리펀드를 완료하고, 로마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꿀잠을 잤다. 입국심사가 까다롭다던 히드로 공항에서도 별 탈 없이 입국도장을 받고 런던에 입성했다. 피카딜리 서커스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나부끼는 유니언잭과 도로를 종횡무진하는 빨간 2층 버스, 그리고 BBC 셜록 시리즈에서만 보던 검은 택시들이 "그래! 여기가 바로 런던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라이온킹 뮤지컬이 아니었으면 런던은 이번 여행지에 포함하지 않았을 거다. 뮤지컬 하나만 보고 온 도시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바로 23시간 레이오버의 항공편이었다. 그런데 웬걸, 런던은 그냥 도착하자마자 매력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어쩌면 23시간이라는 아주 한정된 시간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라이온킹 뮤지컬을 보기 전에 저녁식사를 하고 잠깐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런던에서는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단 두 끼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현지 음식을 먹고 싶었으나, 익히 알려진 것처럼 비싸기만 하고 맛없는 것이 런던 현지의 맛은 아닐는지. 특별할 것 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템즈강과 런던아이 구경을 하다가 뮤지컬을 보러 갔다. 매일 1-2회 하는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만석이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Circle of Life>가 라이브로 울려 퍼지면서 무대 사방에서 동물 분장을 한 배우들이 등장했다.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던, 벅찬 순간.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엄마도 어린아이 마냥 신기해하며 공연을 즐기는 모습에 2배로 신이 났다. 라이온킹 앞에서는 나이의 장벽도 언어의 장벽도 힘없이 무너지는 게 틀림없다.


인생 버킷리스트 달성!


한바탕 꿈같았던 공연이 끝나고 밖에 나오니 강바람이 어마무시했다. 그래도 런던의 마지막 밤, 게다가 유럽의 마지막 밤이기도 한 오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여느 때처럼 "추워, 추워"를 연발하며 숙소로 돌아가자고 하는 엄마와, 엄마는 숙소로 모셔다 드리고 다시 혼자 나와서라도 야경을 봐야겠다는 나의 신경전이 있었다. 엄마는 본인이 추운 것보다 런던의 밤거리에 딸내미를 혼자 두는 것이 더 못 미더웠는지,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나를 따라 걸었다. 엄마의 코 훌쩍이는 소리에 금방 숙소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아쉬움일 것이다. 언젠가 런던에 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여유롭게 강변을 거닐며 아름다운 런던의 밤을 만끽하리라.


내일이면 한국에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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