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밀라노에서 묵던 에어비앤비 숙소의 엘리베이터가 페인트칠 중이라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야 했던 아침. 그 말을 듣자마자 대로한 우리 엄마. 작은 체구의 동양인 중년 여성에게서 저 정도의 분노 게이지가 차오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페인트공 아저씨는 "Calm down, calm down" 하며 엘리베이터를 쓰게 해 줬다.
그것 외에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베니스행 기차도 5분밖에 연착이 되지 않았고, 기차에 타기 전 사 먹은 스폰티니 피자도 그 유명세만큼이나 맛있었고.
문제는 산타루치아역이 아닌 메스트레역에 내려버린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종착역에서 내려야 하니 맨 마지막에 내리면 된다고 했으나, 성격 급한 우리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길래 생각 없이 따라 내리고 보니 메스트레역이었던 것. 역에서 나오고 보니 도무지 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풍경 덕분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급히 티켓을 다시 끊었지만 줄줄이 연착에, 취소에, 1시간가량을 꼼짝 못 하게 되었다.
열차가 지연되는 어쩔 수 없는 일에 짜증을 내며 기차가 들어올 때마다 이거 타면 되지 않냐며 보채는 엄마에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결국 기차에 오르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맞다, 나는 울보다.) 나 혼자 왔다면, 아니, 엄마랑 같이 왔어도 짜증 내거나 보채는 대신 그냥 기다려줬다면 "우리 참 바보 같았다" 하며 또 하나의 해프닝이 생겼다며 웃고 넘어갔을 것을, 하면서.
울면서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베니스는 어쩜 그리도 좋은지. 24시간 내내 빛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젤라또도 있고, 무엇보다 음악이 있었다. 산 마르코 광장 곳곳의 노천카페에서 라이브 연주는 내가 베니스를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비엔나보다도, 프라하보다도 더 음악이 가득한, 낭만적인 광장이다.
테이크아웃 파스타 전문점에서 먹물 오징어 파스타를 사 와서는 광장 한켠에 앉았다. 입가에 검은 먹물을 잔뜩 묻힌 엄마한테 이게 그 유명한 먹물 립스틱이냐며 놀리고 있는데, 자꾸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러더니 그 중 두 무리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어디에서 산 파스타냐고 물어본다. 아무래도 너무 맛있게 먹었나 보다.
친절히 구글 맵까지 켜서 가게 이름을 알려주고, 이 가성비 좋은 맛집을 알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노천카페 가까이에 갔다. 노천카페에 음식값, 음악감상값, 자리값을 지불한 이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덕분에 우리는 뒤편에 서서 박수와 호응만으로 라이브 연주를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고, 한 곳에서 연주가 끝나면 힘껏 박수를 치고는 맞은편 카페에 가서 연주를 감상하는 스킬을 연마하기에 이르렀다. 비낭만적으로 시작한 베니스 여행의 첫날을 낭만적으로 마무리한하루. 그 낭만에 취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 처음으로 엄마에게 연애 고민을 털어놨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