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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오라비행 Aug 03. 2019

볼빨간 술쟁이

목요슬

[주의! 글에서 술냄새 남]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술을 마셔보았다. 프링글스 통에 운반되어 변기 뚜껑에 숨겨두었던 맥주 한 캔의 맛은 생각보다 밋밋했다. 알코올성 액체를 마시는 행위 그 자체에는 별 게 없었다. 다만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고 있다는 짜릿함과 두려움의 감정에 취했던 것 같다. 그 감정은 처음에만 유효한 것이라 그 후로는 별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가지며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슬프게도 나는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


맥주는 500cc, 소주는 두 잔 정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진다. 이때에 빨개진다는 것은 열이 올라 뺨이 발그레해지면서 사람이 생기가 도는 것과는 다르다. 얼굴의 혈관들이 모두 확장되어 전체적으로 붓고 얼굴은 진붉은색으로 몸 곳곳에는 울긋불긋한 반점이 생긴다. 내게는 취기는 곧 열기인 셈이다. 혹자는 얼굴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오래 알고 지낸 이들은 그러려니 하지만 새로운 술자리에서는 항상 화젯거리가 되는 몹쓸 몸뚱이. -


정신보다 몸이 먼저 취하면 이내 잠이 몰려온다. 20대 초반에는 술집 한 켠에서 찌그러져서 자다 일어나서 다시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요새는 그냥 집으로 간다. 정신력으로 버틸 수는 있지만 내일의 체력을 땡겨쓰는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게다가 누군가 집에 가겠다고 하면 술자리가 짜게 식는 경우가 많아 보통은 친한 사람에게만 말하고 조용히 빠져나올 때가 많다. 웃긴 건 집에쯤 도착하면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알딸딸하게 취한다는 거다. 집에만 들어오면 괜히 비틀거리며 옷가지를 내던지고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취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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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바깥에서 수고롭게 취하기도 싫고, 때로는 빨간 탱탱볼 같은 얼굴을 보이는 것도 싫어 요새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술은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 볼빨간 술쟁이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힘들다. 술 마시는 것도, 타인들과 있는 것도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기에. 영화 더 랍스터에는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 주류들을 급습하는 데 성공한 솔로 게릴라들이 승전 댄스파티를 여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한 데 모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영화로서는 기괴하고 보는 이에 따라 오싹하기도 하지만 내게 마음 편한 음주행위란 이와 같다. -


의식할 누구도 없이 자유 연상에 빠져드는 것 말이다. 달아오르는 몸의 열기를 느끼며 술잔을 홀짝이는 것. 빨개진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이러다 터지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것. 지나간 연인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상념에 빠지는 것. 네이버 클라우드를 켜서 지난 사진을 보는 것. 그러다가 하품이 나오면서 ‘됐고 잠이나 자야겠다’ 하며 알딸딸하게 잠에 드는 것.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무인도에 꼭 가져가야 할 물건 중 하나는 주류임에 틀림없다.


#목요슬 #아오라x비행공간 #aoraxbiheng #음주글쓰기 #혼술최고된다 #어디서살지 #여기서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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